[영남시론] 박상진 의사를 생각하며

  • 유영철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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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3-02   |  발행일 2022-03-02 제27면   |  수정 2022-03-02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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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3·1절을 맞아 독립운동에 온 재산과 온몸을 바친 민족지사들을 생각한다. 한두 분이 아니지만 대구에서 활동하고 대구에서 순국하신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 의사를 먼저 떠올린다.

박 의사는 1884년 12월7일 울산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경주 외동읍 녹동리에 백부(박시룡)의 양자로 입적됐다. 1902년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旺山 許蔿·1855~1908)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박 의사는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그러나 나라가 침탈되자 기득권을 버리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망설임없이 만주로 건너간다. 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선생과 독립투쟁 방략을 모색한다. 귀국 후인 1912년 독립운동의 재정 지원과 정보 연락을 위해 대구 약전골목에서 상덕태(尙德泰)상회라는 곡물상회를 설립한다. '상덕태'는 '박상진·김덕기·오혁태' 동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 박 의사는 당시 울산에 있던 논 900마지기(18만평)를 팔아 대구 상덕태상회를 통해 독립군자금을 댄다. 박 의사의 스승 왕산 선생도 구미 임은동에 있던 땅 3천마지기(약 60만평)를 팔아 일가가 의병에 참여하며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박 의사는 1915년 대구 앞산 안지랑골 안일암에서 독립운동단체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해 대구 달성공원에서 무장 독립활동을 위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했다. 총사령을 맡았다. 본부를 대구에 두었다. 대한광복회는 일제의 세금수송마차 탈취, 금광 습격, 친일부호 암살 등 독립쟁취·친일타파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1918년 일제경찰에 체포된다. 박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옥고 끝에 1921년 8월11일 삼덕동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의사의 나이 37세였다.

이처럼 박 의사는 울산에서 태어났으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항일운동은 거의 대구에서 펼쳤다. 박 의사와 대구는 밀접한 연고가 있는 셈이다. 울산시에서는 오래전부터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펴고 있다. 경주시도 지난해 박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추모행사를 벌였고, 지금은 묘소 정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대구는 아무런 추모행사가 없다. 후대를 위해서라도 대구는 박상진 의사 등 대구에서 활약한 항일독립지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정기를 본받기 위한 헌창사업을 추진하며 의혼을 기려야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대구의 정치인들이 늦었지만 솔선해 적극적으로 나서 주기를 희망한다.

사족을 단다. 일제 하 독립운동에 헌신한 민족지사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이 1965년 사단법인으로 광복회를 설립했다. 그런데 국가보훈처는 지난달 10일 광복회 김원웅 회장이 독립유공자 유족장학금에 사용할 돈을 횡령했다는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보훈처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김 회장은 엿새만인 지난달 16일 사퇴했다. 광복회가 회장의 불명예 중도퇴진과 현 집행부에 대한 회원들의 불신 등으로 제자리를 찾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뜻있는 대부분의 회원은 이 같은 사태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한다. 능가경(楞伽經)에 나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견월망지(見月忘指)'가 떠오른다. 광복회 회장의 의혹 등은 '손가락'과 같은 지엽적인 노출로, 조국 광복을 위해 온몸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은 '달'과 같은 것으로 보고 싶다.
유영철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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