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 인문학] 일제 강점기때 내몰린 제주해녀 경북 동해안권으로 몰리다](https://www.yeongnam.com/mnt/file/202205/2022050601000062000002411.jpg) |
해녀 중 해녀는 '상군해녀'. 나름 제사장 같은 위엄을 갖고 있다. 수십 명의 부하 해녀를 거느리고 다닌다. 그들은 계절별 최고의 채취 포인트로 안내해야 한다. 〈환동해지역본부 제공〉 |
해녀는 '여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 어떤 억센 남자보다 더 억세다. 그들은 생업전선에선 '전사(戰士)'로 돌변한다. 드센 목청은 파도 소리를 압도할 정도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어찌 된 셈인지 대다수 생활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럴까, 해녀들은 툭하면 '지질히도 복도 없는 년'이라고 자신을 타박하지만 결국 팔자소관으로 체념하게 된다. 그 시절, 상당수 해녀의 남편들은 아내가 물질하러 가는 사이 무료한 시간을 주막에서 술추렴을 했다. 아내가 뭍으로 나올 즈음 바다로 가서 아내의 해산물을 받아 올려주는 게 그의 유일한 소임이다. 해녀들은 해산물 채취, 밭농사, 육아, 집안 살림까지 1인 4역을 감내해야만 했다.
지난해 경북도가 의미로운 해녀 관련 인문학 도서를 출간했다. '경북도 해녀문화인문사전(하응백·김선태·권선희 공저)', 그리고 '경북 동해해녀음식이야기(섬학교 교장 강제윤 시인)'다. 제주도 해녀문화만 부각됐는데 이참에 경북 동해안 해녀의 연대기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조만간 구룡포에 해녀학교도 개교될 예정이다.
수익 분배율, 제주 해녀-5·어촌계-5
경북은 3:7…구룡포선 해녀가 7로 높아
일제 잠수기선 진출, 제주 연안 황폐
1962년 경북 온 출향해녀 1584명 절정
울릉도엔 전국 유일 홍합 따는 '해남'
35년간 물질 구룡포 성정희 어촌계장
경북도 153계 어촌계 중 첫 해녀 출신
64세에 구룡포수협 첫 女 이사 경력도
'어촌 뉴딜 300사업 꿈' 청사진 제시
◆상군해녀
해녀 중 해녀는 '상군해녀'. 나름 제사장 같은 위엄을 갖고 있다. 수십 명의 부하 해녀를 거느리고 다닌다. 그들은 계절별 최고의 채취 포인트로 안내해야 한다.
해녀 세계에는 공짜는 없다. 그래서 해녀와 어촌계의 관계는 더욱 복잡다단하다. 어촌계가 해녀들의 입어를 철저히 통제하는 곳도 있고 이와 달리 입어 여부를 해녀들이 결정하는 곳도 있다.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의 위판을 어촌계가 통제하는 곳도 있다. 마을 내 해산물 공동판매장을 운영하거나 아예 개별적으로 운영하는 횟집에서 자체적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해녀와 어촌계의 수익 분배율도 지역마다 다르다. 제주도는 해녀와 어촌계가 반반씩, 경북 울진·영덕·경주의 경우는 해녀와 어촌계가 3 대 7로 나눈다. 하지만 구룡포 지역에선 해녀의 발언권이 세다. 해녀가 7, 어촌계가 3을 가져간다. 집단 수확물은 여름에는 성게, 전복·소라·미역·해삼 순이고 겨울에는 말똥성게·전복·문어·해삼 순이다. 개별적으로 채취하는 것 중에는 미역이 가장 많다.
'물때(해녀 조업 일수는 연중 100일 남짓, 음력 8~14일, 23~29일 물살이 약할 때 일한다)'가 오면 호미를 팽개치고 수중으로 간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도 할 겨를없이 자맥질을 했다. 보통 전통해녀는 8세부터 마을의 얕은 바다에서 헤엄과 잠수를 익혀 15세 무렵에 애기해녀가 된다. 1970년대 초부터 속칭 '고무옷'이라고 하는 잠수복이 보급된다.
◆제주해녀 경상도 입성
제주도는 '대한민국 해녀 총사령부'. 그토록 막강한 제주 해녀.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본 잠수기선이 진출하면서 제주 연안이 황폐해져 해녀 산업이 파산 지경에 이른다. 먹고 살기 위해 해녀들이 하나둘 제주도를 떠난다. 이들을 '출가·출향 해녀'라 한다. 부산에 근거를 둔 수백 명의 객주들은 일본 무역상의 하수인으로 해녀 모집 겸 감독자가 되어 매년 음력 정월~2월 제주도로 들어왔다.
고종 27년(1890년) 제주도에 처음으로 기선이 취항한다. 제주와 부산에 이어 제주~목포 노선이 취항한다. 1954년 경북지사와 제주지사 사이에 자유 입어를 허용하는 각서가 교환된다. 한때 어장 관리에 위협을 느낀 경북 어민들이 제주 해녀의 입어를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2년 수산업협동조합법이 제정되면서 해녀 사회도 안정을 찾게 된다. 1937년 '제주도세요람'을 보면 경남이 1천650명, 경북은 473명, 전남 408명 등 2천801명, 일본으로는 1천601명이다. 1962년 경북에 도착한 출향 해녀가 1천584명으로 피크를 이루게 된다.
자연 부산·울산·포항·울릉도를 축으로 경북 동해안권에 제주 해녀가 많이 포진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한림읍 협재리에는 지금도 '울릉도 출어 부인 기념비'가 서 있다. 제주 해녀 김공자가 독도의 명물인 강치를 안고 있는 사진도 귀한 연구자료로 평가된다.
독도에 제주 해녀들이 입도한 건 1954년부터. 거기서 수확된 미역 등은 울릉도로 실어 보냈으며 포항을 거쳐 동대문 시장까지 판로를 넓힌다. 제주도에도 2006년 해녀박물관이 생긴다. 제주도 다음으로 막강한 해녀 문화가 있는 데는 부산 영도인데 거기도 해녀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1975년 수협법이 개정되면서 제주 해녀들의 원정물질은 중단된다. 현재 경북 동해안에는 2천여 명의 해녀가 활동 중이지만 그 숫자는 매년 줄고 있다.
◆해녀와 해남
1970년대만 해도 제주 출신 해녀 50여 명이 울릉도에서 물질했다. 하지만 지금 울릉도 해녀는 씨가 마를 정도로 급감 중이다. 잠수기 어선의 등장 때문이다. 9개 어촌계에서 잠수기 어선을 동원해 해산물을 채취하게 되면서 제주 해녀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
울릉도에는 아직도 전국 유일이랄 수 있는 '해남(海男)'이 있다. 죽암어촌계장인 손홍준씨(75). 30년 전쯤 울릉도에 홍합붐이 일 때 한 방송에서 삼선암에서 홍합 따는 해남으로 소개되면서 알려졌는데 지금은 작업을 하지 않는다.
경북도 153계 어촌계 중 유일하게 해녀 출신인 어촌계장이 있다. 바로 35년간 물질해 온 구룡포 성정희(70) 어촌계장이다. 그녀는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대구 경북여상에 입학한 첫 도시 유학생. 28세 때 결혼해 부산에 살았고 남편 사업 실패로 34세에 고향으로 와 해녀의 길을 걷는다. 해녀 팀장에 이어 64세 때 구룡포수협 첫 여성 이사가 되고 지난해 일흔에 꿈에도 그리던 어촌계장이 된다. 꿈을 위해 카네기 스피치 교육도 받고 '어촌뉴딜300사업'이라는 구체적인 청사진도 제시했다.
구룡포에서만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일손이 부족해 지원요청을 하면 13~14명을 모아 원정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갈 길이 멀어요. 해녀는 점점 고령화 되어가고 자원은 줄고 밤에 다이버 도둑까지 극성을 부립니다. 단순한 물질만으로는 해녀 공동체가 유지되기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해녀, 일한 만큼 이상의 대가 돌아오는 직업도 그렇게 많지 않으니 젊은이들이 과감하게 도전해 봐도 좋을 것 같다.
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