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절망 앞에서 한 발자국을!"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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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06   |  발행일 2022-05-06 제35면   |  수정 2022-05-06 08:40
[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절망 앞에서 한 발자국을!
여수 예술의 섬 장도. 최병수 작가의 설치 작품
아침엔 봄, 낮에는 여름, 밤엔 초겨울 날씨였다. 4월은 서둘러 지고 여름이 와버렸다. 봄비가 내리면 밤꽃 향기가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그 흔적을 기웃거리는 바람은 역마살을 부추긴다. 송창식의 '나그네'와 '밤눈'을 오래 들었다.

이어령 장관도 가고 소설가 이외수도 갔다. 20세기 정서에 편승한 문인들은 목로주점 하나 제대로 분양받지 못하고 21세기에 자꾸 걸려 넘어진다. 만만한 게 낮술이었다.

세상을 떠돌다가 충북 옥천의 한 야산에서 옻된장을 만들고 있는 박기영 시인. '역마살 도사'인 그가 지난 주말 마당에서 옻 잔치를 벌였다. 한때 김민기, 정태춘, 하덕규, 전인권 등과 허교했던 싱어송라이터 이무하도 은둔을 풀고 여기 와서 성결한 노래를 풀어냈다. 다들 낮술에 젖어 들었다.

거기는 밤보다 아침이 더 어두웠다. 웃음이 꽃으로 추락하는 영토였으니 죽음은 바람보다 더 가벼울 수 있는 것. 절벽 앞에서 '한 걸음 더'를 생각해 낸 자의 일생을 한 줄로 줄여주는 울음, 그 옆에 주막 차리고 한 생을 저당 잡힌 얼굴 없는 자의 계절은 이번 세기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슬픔이 실은 전략이라는 걸 믿고 싶은 건가. 노을보다 더 영롱한 취기를 상여처럼 메고 태어나지 않은 듯 지나온 모든 필체를 지워나가는 그대 낮술이여.

술이 깨기 전에 술을 들이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술병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그들은 툭하면 떠난다고 하지만 사실은 떠날 곳이 없다. 가장 무서운 게 혼자 되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언저리에 포진하는 외로움과 고독을 우린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 모두 떠나지만 파멸스러운 틈으로 술이 위로처럼 다가선다.

[이춘호기자의 행간을 찍다] 절망 앞에서 한 발자국을!
이춘호 전문기자
타인을 향할 때는 '포로', 자신을 향할 때 '머슴'이 된다. 몸과 맘의 소유권자가 실은 내가 아니라는 것…

명상에 든 바위. 나도 그 앞에 앉아 잠시 눈을 감는다. 절대적인 슬픔은 절대 노출되지 않는다. 태어난 자는 이미 진 자일까. 이미 사라져 버린 자는 한 수 위, 아예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 자가 어쩜 진짜 고수일까.

여수 아트랜드 장도에서 만난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 보는 사내를 행찍용 사진으로 내민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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