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코로나 망자를 위한 弔詩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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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13   |  발행일 2022-05-13 제33면   |  수정 2022-05-13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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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6토막의 그림은 인간의 일생을 구분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태어나서 가족끼리 오순도순 즐기며(1) 동화처럼 화창한 나날(2)을 보내다가 시련(3)과 코로나로 영면(4)에 들고 이후 연옥 같은 중음계(5)를 거쳐 궁극에 고통과 절망이 없는 유토피아(6)에 도달한 과정이다.


어느 무덤, 어느 폐광(廢鑛), 아니 어느 녹물 삭아 내리는 폐가(廢家)의 추녀 밑, 표정이 모두 사라진 땅속 유물 곁이거나 학살장의 으스스한 고요,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외딴 등대 아래 낮달처럼 번지고 있는 그늘에 일생을 걸어둔다면, 밤보다 더 어둑한 대낮을 모두 짓이겨 버리고 태양도 밝혀줄 수 없는 마지막 악령의 굴 안으로 기어들어 가 그는 마침내 코로나 팬데믹 망인(亡人)이 되어버렸다.

말도 버리고 글도 버렸으니 마지막엔 쓸모없는 혀도 잘라 버렸고 그래서 능히 지상의 모든 세기(世紀)를 탕진할 수 있었다. 전생으로 향하던 부모의 연대기까지 모두 부정한 걸 그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습관과 세속에 찌든 얍삽한 혼령은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악령(惡靈)에 오래 감금되었고 어느 날 보란 듯이 망령(亡靈)에 입문해 빙하보다 더 꽝꽝한 광인(狂人)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만의 창세기와 신화를 짓기 시작했다. 달무리 속에서도 용암 속에서도 암약할 수 있었고 세상이 해독할 수 없는 야릇한 미소까지 피워물 수 있었다.

하지만 능지처참 된 육신은 차츰 피멍과 피고름 습기와 주름 썩거나 부패하거나 허물어 내리거나 말라버리거나 멍들어버린 버려지고 외면당하고 지워지고 있는 것들의 온갖 한숨과 울음, 그리고 오열과 우울을 채집해 와 제 척추 안에 야금야금 밀장시켰다. 그것은 그만이 허락한 연금술의 세월이었으리라. 인간의 영토에서 아득히 멀어진 그래서 그 용처(用處)를 잃어버린 가슴팍도 증발해 버리고 끝내 오감까지 깡그리 무장해제 된다. 오, 비극은 왜 절대 중력장을 벗어나지 못한단 말인가. 죽을 때까지 죽음만을 살아야 할 뿐, 스스로 악인이란 낙인을 찍어버린 그에게 일용할 양식은 해독제 없는 고독과 외로움, 그걸 수습할 수 있는 건 중얼거림이거나 식은땀이거나 쌍욕이거나 발광이거나 수음과 광기뿐, 그 황무지 같은 대지 위에 천사의 보법으로 다가오는 이가 있었으니 설한풍이거나 폭풍우거나 대숲 일렁거림이거나 나이테 형국으로 밀려오는 강물과 바다에 돋아난 윤슬 정도랄까.

인적 드문 음지 혹은 야음 틈탄 달빛에 실려 망연자실 쉬 오지 않는 죽음만 기다리고 있다고 그는 고백했다. 몸만 염주처럼 돌리며 지난 달력의 날짜 위를 무료히 서성거리는 시간에는 폐지(廢紙) 같은 손바닥 펴놓고 굴욕의 가족사를 들여다 보고, 그게 하도 심란하면 술꾼들이 남겨놓고 간 소주를 울음 같이 들이켠다. 그런 그의 하늘에 박힌 별빛은 면도날보다 더 예리하게 가슴을 후벼판다. 파도는 주름살보다 더 서럽게 출렁거리고 알코올이 뮤즈로 난입 그의 위벽에 각인해 놓은 음표들은 원시 벽화보다 더 야수적이고 야만적이었다. 취기에도 수심(水深)이 있었던가. 순식간 용암 같은 혈류에 편승해 웃음이 울음으로 고꾸라지던 날의 지옥도(地獄圖) 같은, 때로는 쥐약처럼 진군해 오는 악몽의 꼭두를 만나 보기도 하지만 그는 맹세코 자살만은 하지 않았다. 그건 차라리 신기루의 몫이라 해두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눈을 떠봐도 늘 쓸쓸히 바람만 붐비는 거리, 출근을 잃어버리고 오직 동네 마트 앞 간이의자에 앉아 종일 술로 탕진하는 알코올 중독자의 굽은 등, 그건 덜 절망한 자에겐 얼마나 큰 각성이고 위안인가. 계속 마셔라 간이 작살 난 날에도 또 다른 간을 이식해 계속 더 퍼 마셔라 불 맞은 나무의 몰골로 새카맣게 죽어가는 그 사내의 동공에 하늘이 하얀 소실점으로 고여 있다. 이듬해 피어날 매화가 누에고치처럼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불빛이 사라진 포구, 세 다리로 걷는 비 맞는 고양이. 그가 스쳐 지나간 뒷골목 실비집 인생 저문 늙은 주모의 젖보다 더 폭삭 내려앉은 거미줄 투성이 전등갓에 추억과 그리움이 흐릿하게 매달려 있다. 구름이 가끔 귀뚜라미 울음 흘리면서 거기서 잠시 놀다 간다. 그는 그게 도시에서 버림받은 나비의 서신이라 믿는다. 바다와 별, 그리고 베어먹다 버려놓은 듯한 과일의 몰골을 지닌 달빛, 한없이 눅눅해진 그의 살점을 위해 지상에서 가장 우울하고 가난한 카니발을 매일 한 편씩 내밀어 본다.

이제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방전된 듯 뒤꿈치가 조금씩 사막으로 풍화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그가 타고 온 강도 바다로 몸을 바꾸고 그렇듯 삶은 능히 아득하고 죽음조차 도무지 미동이 없어. 숨 덩어리가 휙 콧구멍 속을 날개처럼 빠져나간다. 향긋한 곰팡이 냄새가 피어난 걸로 봐선 이집트 피라미드에 알처럼 슬어있는 미라 곁으로 날아갈 모양이구나. 오 노을이 청동빛으로 무너지고 있다. 육탈 의식을 집전하는 바람의 손길, 검은 머리 희게 둔갑시키는 세월만큼의 위력이었다.

모든 게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몸의 주인이 몸이 아니듯 진짜 주인은 오래 전 그에게 빌려준 몸을 반납받아 사라진다. 간신히 붙어 있던 누더기 살점은 파도의 쉼표가 되고 빗줄기와 눈발, 그리고 햇살들이 달려들어 주검을 깡그리 뜯어가 버렸다. 눈시울처럼 남은 뼛조각 어느 여행자의 반지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 많은 경전과 그 숱한 성인(聖人)의 혜안으로도 서둘러 절망에 방점 찍어버린 한 생을 일점일획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게 '통쾌한 복수'라 여겼다.

갈 곳도 바랄 것도 위할 것도 없는 저 천지 망연자실한 바람의 종족이란 증표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여물고 적막한 단말마 하나를 명품으로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구는 더 이상 그걸 소장할 용기가 없었다. 해가 뜨고 질 때마다 밑도 끝도 없이 새어 나오는 세기말의 그 비명 소리가 아침을 여는 새들의 첫 울음소리로 전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려는가. 희망으로의 진군은 너무나 야비해서 멈춘 지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이승 향한 미련도 아쉬움도 없기에 그의 주검은 너무나 가볍고 투명하고 홀가분하고 한가하고 평화롭기까지 하여 능히 저승 딛지 않고 단번에 자연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를 잃고 홀로 남은 빈방의 그림자는 서둘러 그믐밤을 충전하는 파도로 투신해 버렸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계의 또 다른 신생 광기는 실패한 자의 보법으로 세기말이란 버전으로 지금도 팬데믹 묘지로 꾸역꾸역 밀려들고 있다. 그가 없어도 여전히 실존하는 그라는 한 물건, 절망 앞으로 한 발자국을 더 내디딜 수 있는 만큼의 바람을 실시간으로 흘려보낸다. 그리고 바람의 사자(使者)로 변장해 갓 절망에 든 모든 손아귀에 일일이 백신을 쥐여주고 있다. 희망의 정수리에 절망을 번개처럼 이식해주는 것인가. 그건 아직 절망에 다다른 자가 지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걸 말하려는 듯 모든 날이 실은 세기말 장송곡이라 귀띔하려는 듯.

글·그림=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에필로그=이 조시와 그림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유명을 달리한 망자를 위한 조시다. 아직 그들에 대한 정중한 배려와 위로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 그리고 이 시간에도 자본주의의 냉엄한 범주에서 버티지 못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 중인 많은 비극적 존재들을 위해 이 글을 헌정하기로 했다. 다소의 격한 표현은 기자의 문학적 상상력이라 이해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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