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여름별미 '냉면'(1) 독립 운동가 김구·안창호 선생도 즐겨 먹어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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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27   |  발행일 2022-05-27 제33면   |  수정 2022-05-27 08:54
고려초~조선중기 차가운 국수 '냉도'라 불러

1900년대 자전거 보급 늘며 냉면 배달 전성기

규모 큰 냉면집은 배달부만 15명 두고 성업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여름별미 냉면(1) 독립 운동가 김구·안창호 선생도 즐겨 먹어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 개발했던 닭가루를 이용한 '닭냉면'.

국수도 그렇지만 냉면(冷麵)의 지형도도 참 복잡다단하다. 국내 유수 언론의 기자들도 그 어원은 추적할 수 없으니 몇몇 유명 음식기원 연구가의 글을 통째로 긁어 와 사용하는 게 현실이다. 크게 보면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 음식칼럼니스트 윤덕로, 음식 원류를 추적하고 있는 황광해와 박정배 등이 그래도 객관적으로 냉면의 족보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도 김 원장과 냉면에 대해 많은 얘기를 다듬었다. 다음의 내용은 냉면에 관한 한 가장 풍부한 자료의 집적이랄 수 있겠다.

냉면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차가운 국수'. 고려 초기에서 조선 시대 중기까지 '냉도(冷淘)'라는 음식명을 병행했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의 '목은집(牧隱集)' 제17권 시(詩) '하일(夏日)의 즉사(卽事)', 조선 중기 문신인 포천 출신 용주(龍洲) 조경(趙絅·1586~1669)의 목판본 '용주유고(龍洲遺稿)'에도 냉도란 단어가 등장한다.

학계 등에서는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시 '자장냉면(紫漿冷麵·자줏빛 냉면)'이 냉면 관련 최초의 문헌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냉도의 속살을 들여다보자.

유두일(流頭日)은 명절의 하나인 음력 6월15일을 가리키는데, 옛날 민속에 이날은 향인(鄕人)들이 동류수(東流水)에 나가 머리 감는 모임을 하면서 이것을 유두라 일렀다고 한다. 이날은 특히 유두면(流頭麵), 밀전병 등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놀았다고 한다. 이때 유두면으로 '괴엽냉도(槐葉冷淘)'를 해 먹었다. 이것은 홰나무 잎의 즙을 밀가루에 섞어서 만든 일종의 냉면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냉면을 냉도, 냉도면, 과수면(過水麵) 등으로 불렀다. 청나라 반영폐(潘榮陛)의 '제경세시기승(帝京歲時紀勝)' 하지(夏至) 조에는 '서울(연경)에서는 이날 집집마다 냉도면을 갖추어 먹는데, 즉 속설에 과수면(過水麵)이라고 한다'라고 적어놓았다.

당나라 시성 두보, 소동파 등도 '괴엽냉도(槐葉冷淘)'란 말을 사용했다. 냉도는 수화(水花)나 괴엽 따위를 밀가루에 반죽하여 떡을 만들고, 그것을 잘게 썰어 술에 담가 두었다가 식혀서 먹는 음식인 듯하다. 그리고 괴엽이란 것도 꽃 피는 괴화(槐花)가 아니며 느티나무인 듯하다. 우리나라도 느티나무를 '괴화나무'라 했다.

중국의 냉도가 우리처럼 면을 차갑게 해서 먹는 것이지만 조리 방법 등이 전혀 다르다. 우리 냉면은 문헌적으로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여름별미 냉면(1) 독립 운동가 김구·안창호 선생도 즐겨 먹어
개화기 시대 냉면을 재현했던 대명동 단포식당의 '냉교면'.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로 접어드는 시기에 남대문에서 종로에 이르는 거리에는 주점, 팥죽집 등 음식점이 즐비하였는데, '군칠'이라는 주점은 평양의 냉면, 개성의 산적 따위를 팔았고, 밤에는 불을 켜놓고 영업을 하였다고 한다. 평양과 개성의 특미가 서울 주점의 메뉴로 등장할 정도였던 것이다.

냉면 배달은 1900년대 초 자전거 보급 확대로 전성기를 맞는다. 한 사람이 여러 그릇의 냉면을 걷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배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백현석· 최혜림의 저서 '냉면열전'을 보면 서울 종로구의 한 냉면집 배달부가 인근 양복집으로 냉면 81그릇을 배달했다고 한다. 당시 규모가 큰 냉면집의 경우 배달부만 15명을 뒀다고 한다.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여름별미 냉면(1) 독립 운동가 김구·안창호 선생도 즐겨 먹어
온면 버전의 냉면처럼 보이는 '의령의 메밀소바'.

냉면은 독립운동과도 인연이 깊은 음식이다. 독립운동가 이탁(李鐸)은 광동군관학교를 수료하고 만주 봉천(현 선양)을 거쳐 국내로 잠입한 다음, 평안남도 평원군 숙천읍 동부지역에 냉면집을 구입하여 국내연락처를 설치하였다. 백범 김구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늘 체포와 암살의 위험 속에서 살았는데 한번은 전차 검표원으로 별명이 '박 대장'인 사리원 출신 젊은이의 청첩을 받고 축하차 방문하여 급히 냉면 한 그릇을 받아먹고 온 김에 이웃 동포 가게에 들렀는데, 미처 앉기도 전에 일경이 박 대장 집에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그는 1948년 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에서 김일성과 담판을 짓다가, 밤에 숙소에서 몰래 빠져나와서 냉면을 먹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는 1941년 중국으로 건너가 안후이 회남, 장쑤성 서주 등을 전전할 때 서주에서 냉면집을 운영한 적이 있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는 일본 사법당국으로부터 4년 형을 받고 경기도 경찰부에 유치되어 있을 때 간수가 냉면을 좋아하는 도산에게 냉면을 시켜 주었다. 냉면을 좋아하는 김구를 만나면 냉면 두 그릇씩 비웠다고 전해진다.

대담=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원장·이춘호 음식전문기자
정리·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김영복·이춘호 '한식 삼천리'] 여름별미 '냉면'(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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