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0] 무장 서예가 악비…명장의 굳센 충성심이 일어나는 기운이 붓끝에서 물씬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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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7-01   |  발행일 2022-07-01 제34면   |  수정 2022-07-01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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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가 쓴 제갈량의 전 출사표 마지막 부분. 석판에 새겨져 있다.

악비(岳飛·1103~1141)는 중국인에게 가장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명장이다. 중국 남송 초기의 무장인 그는 서예가이기도 했다. 남송의 영종이 1204년에 악왕(鄂王)에 봉했기 때문에 흔히 '악왕'이라고도 부른다. '송사(宋史)'의 '악비전'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고니처럼 큰 새가 지붕 위에 앉아서 이름이 '비(飛)'가 되었다고 한다.

북송 말기에 군대에 들어간 그는 금나라의 침공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군대를 이끌고 연전연승하며 금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장군이다. 그는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주전파에 속했는데, 주화파인 당시 재상 진회의 모함으로 39세에 죽임을 당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악비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영웅으로 수천 년 동안 중국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가 다른 무인들보다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학문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글 읽기 또한 좋아해 '손자' '오자' 등의 병법을 두루 섭렵하고, 역사를 공부하며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를 탐구하는 등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138년 어느 날, 악비가 군대를 이끌고 하남(河南)의 남양(南陽)을 지나다 비가 내려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에서 머물게 되었다. 사당에서 제갈량의 전·후 '출사표'를 읽게 되고 다음 날 아침, 제갈량의 전·후 출사표를 써서 남기게 된다. 당시 상황을 악비는 이렇게 기록했다.

'무오년(1138년) 가을 팔월 열나흘. 남양을 지나다가 무후사를 참배하게 되었는데, 비가 내려 사당에서 묵게 되었다. 밤이 깊어 초를 켜 들고 옛 현인들의 공명을 찬양한 글과 시가 있어 회랑을 둘러보았다. 사당 앞 비석에는 그가 쓴 전후 출사표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읽고 있으니 눈물이 빗물처럼 솟구쳐 밤새워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차를 담아 온 도사가 종이를 꺼내 놓고 한 자 적어 달라고 하기에 다시 눈물을 흘리며 붓을 들었다. 거친 구석을 생각하지 않고 가슴속 슬픔을 붓이 가는 대로 따라 적는다.'

악비의 대표작으로 전하는 이 전후 출사표는 뒤에 초서로 쓴 악비의 제발(題跋)을 달아 4개의 석판에 새겨져 널리 유전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귀중한 대접을 받았다. 이 작품은 노숙한 필치가 살아 움직이면서 한 기운으로 꿰뚫고, 위아래가 어울리고 좌우가 호응을 이루면서 모든 아름다움을 다했다는 평을 듣는다. 청나라 임개(任愷)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작품은 굳세고 위대하며, 특히 충성심이 울연히 일어나는 기운이 붓끝에서 물씬거린다. 대저 악비의 공로는 실로 제갈량과 더불어 앞뒤에서 비춰주며 천고에 전해질 것이다. 어찌 그 문장과 글씨만 전해질 것인가. 그 문장과 글씨 또한 절대로 마멸되지 않을 것이다.'

악비는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역대로 모든 사람이 그의 사람됨을 존경했기 때문에 그의 서예작품도 보물처럼 여겼다. 악비의 초서는 성정이 강하고 전쟁터에서 자신의 답답함을 붓에 의탁해 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보면 금방 내심의 격렬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글씨는 용과 호랑이의 자태가 있고, 고매하면서 초탈하고 강건하면서 수려하며, 생기가 종횡으로 넘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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