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6] 中 청두 두보 초당...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 위한 근심…봄비 같은 정치 희망하는 詩를 짓다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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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7-15 08:47  |  수정 2023-01-20 08:12  |  발행일 2022-07-15 제35면

두보상(공부사)
두보초당 곳곳에 있는 두보 조각상들.


중국 시인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은 누구일까. 걸출한 시인들이 많지만,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일 것이다. 서로 개성이 달라 대비되면서도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두 시인은 모두 당나라가 특히 번성했던 시기인 성당(盛唐) 시대에 활동했다. 이백은 시의 신선이라는 의미의 '시선(詩仙)'이라 불리고, 두보는 시의 성인이라는 '시성(詩聖)'으로 불린다.

시성 두보(712~770)의 대표적 시 중 하나가 '춘야희우(春夜喜雨)'다.

'좋은 비 시절을 알아(好雨知時節)/ 봄이 되니 내리네(當春乃發生)/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隨風潛入夜)/ 가늘게 소리도 없이 만물을 적시네(潤物細無聲)/ 들길은 검은 구름으로 컴컴한데(野徑雲俱黑)/ 강 위의 배만 불 밝혔네(江船火獨明)/ 이른 아침 붉게 젖은 땅을 보니(曉看紅濕處)/ 금관성에는 꽃이 활짝 피었으리(花重錦官城)'

여기서 금관성은 당시 두보가 살던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의 별칭이다.

최근 지구촌 상황을 보면 중국도, 지구촌 곳곳도 가뭄이 계속되는 봄날의 논밭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제때 맞춰 조용히 듬뿍 내리는 희우, 반가운 비가 절실하다. 자국의 국민은 물론, 지구촌 모든 이들을 위하는 정치지도자들의 멋진 정치가 절실한 때인 것이다.

이 시는 두보가 49세 때 지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두보가 관리생활을 청산하고 청두로 옮겨 초당을 짓고 살아갈 때다.

당시 청두는 오랜 가뭄으로 사람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때에 만물을 흠뻑 적셔주며 소생시킬 봄비가 밤새 내리는 것을 보고 기쁜 마음에 이 시를 지은 것이다. 봄비가 적시에 적당히 내려주기 때문에 반갑다고 했다. 필요한 때 조용히 내리는 반가운 봄비를 읊으며, 이런 봄비 같은 정치를 희망하는 마음도 담았을 것이다.

詩의 성인 '詩聖'
4년간 머무르며 詩 남긴 '두보 초당'
고난의 삶에서 생애 첫 여유로운 생활
생전 1400편 중 240편 쓴 문학의 성지

청나라 시인이 두보 詩會 연 '시사당'
벼슬 업무 '대해'·사당 '공부사' 조성

"감동 주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쓸것"
中 최고 민중시인·불멸의 작가 명성

소릉초당비
두보초당 내 '소릉초당' 비석과 비정(碑亭).



◆4년 동안 머물렀던 초당

이 시를 쓸 당시 두보는 쓰촨성 청두에 살고 있었다. 이 청두에 두보가 살았던 초당을 중심으로 조성한 두보 기념공원 '두보초당(杜甫草堂)'이 있다. 2016년 중국의 대표적 사랑 이야기인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사랑 이야기 관련 유적을 취재하러 청두에 갔다가 이곳도 둘러봤다.

두보초당은 두보가 한동안 거주했던 초당 자리에 조성되었다. 두보 관련 건물들과 이를 둘러싼 광대한 정원으로 구성돼 있다. 총면적은 20만㎡에 이른다. 청두는 고난과 실의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던 두보가 마음의 안정을 얻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유일한 곳이었다.

두보는 '시성'이라는 후대의 명성에 무색하게, 당대에는 빈곤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냈다. 수도인 장안(長安·지금의 시안)에서의 삶도 겨우 하급관리직을 얻는데 그쳤을 뿐 녹록지 않았다. 그러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가족을 이끌고 장안을 떠나 청두로 갔다. 이곳에 가서야 주위의 도움으로 생애 처음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보냈다고 한다.

두보는 이곳에서 240편 이상의 시를 지었다. 봄비를 보며 잔잔한 기쁨을 노래한 명시 '춘야희우'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한밤중에 소리 없이 내려 촉촉이 만물을 적시는 봄비를 묘사한 시구에서 청두에서 소박하지만 평온한 전원생활을 영위하던 두보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두보는 안록산(安祿山)이 755년에 일으킨 안사(安史)의 난을 피해 759년 겨울에 이곳 청두에 왔다. 청두 서쪽 교외에 '꽃을 씻는 시내'라는 뜻의 완화계(浣花溪)라는 시냇가의 절에 기거하다, 복공(福空)이라는 승려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완화계 주변 180여 평에 오두막을 지었다. 정원을 꾸미고 채소밭도 일구었다. 사람들은 '청두초당(成都草堂)' 또는 '완화초당(浣花草堂)'이라고 불렀다.

그는 759년 겨울에서 762년 여름까지, 764년 3월에서 765년 5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이곳에 머물면서 주옥같은 240여 편의 시를 남겼다. 이런 청두는 중국문학의 성지(聖地)로 대접받고 있다. 두보는 생전에 1천400여 편의 시를 지었다.

두보초당은 북송의 원풍년간(元豊年間·1078~1085년) 시절, 청두 지사였던 뤼다팡(呂大防)에 의해 초당이 재건되고 두보 초상을 벽에 그리는 등 사당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 후 병란 등으로 여러 차례 폐허와 중수를 거듭하다가 1811년 지금과 같은 초당이 들어섰다. 1955년 두보기념관을 개관했으며, 1985년 두보초당박물관으로 이름을 고쳤다. 박물관 안에는 3만여 종의 책과 2천여 건의 문물이 소장되어 있다.

초당의 정문(正大門)에는 두보의 시인 '회금수거지(懷錦水居地)'에서 발췌한 '만리교서택 백화담북장(萬里橋西宅 百花潭北莊)'이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두보초당의 위치가 만리교의 서쪽이고 백화담의 북쪽임을 나타낸다.

주요 건축물로 대해(大해), 시사당(詩史堂), 공부사(工部祠) 등이 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연못과 수로를 비롯해 대나무 숲, 녹나무 숲, 매화나무 숲 등이 조성되어 있다. 곳곳에 있는 다양한 두보의 석상과 동상, 두보 시비 등도 볼거리다.

'대해'의 '해'는 관공서를 말한다. 옛날 지방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두보는 벼슬길에 오른 이후 시종 중용되지는 못했지만, 벼슬을 하기는 했다. 초당을 중수할 때, 두보가 벼슬을 했으므로 마땅히 사무 보던 장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여 '대해'라는 이름의 건물을 지었던 것.

시사당은 청나라 시대의 시인과 묵객들이 두보의 시를 추앙하여 시회(詩會)를 열었던 곳이다. '시사'라는 건물 이름은 두보의 시가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의미에서 두보가 '시사(詩史)'로도 불렸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중앙에 짙은 갈색의 두보 소상(塑像)이 있다. 주더(朱德), 궈모뤄(郭沫若), 천이(陳毅), 쉬베이훙(徐悲鴻), 치바이스(齊白石) 등 역대 유명 서화가의 친필 글씨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사당 동쪽의 화경(花徑), 서쪽의 수함(水檻), 뒤편의 시문(柴門)과 흡수항헌(恰受航軒)은 두보가 거주하던 당시를 재현한 것이다.

공부사는 두보를 기리는 사당이다. 두보가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라는 벼슬을 지낸 적이 있어 공부사(工部祠)라는 명칭을 붙였다. 1811년에 건립됐다. 이 안에는 두보의 신위와 두보 상이 있다. 그리고 그 동서 양쪽에 육유(陸游)와 황정견(黃庭堅)의 신위와 그들의 상이 있는데, 이는 이들이 두보의 충군애민(忠君愛民) 사상을 이어받아 실천하며 두보를 특별히 존중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공부사 동쪽에 청나라 강희제의 17번째 아들 과친왕(果親王)이 쓴 '소릉초당(少陵草堂)' 석비와 비정(碑亭)이 있다. 두보의 별명이 두소릉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옹정제의 이복 동생이기도 한 과친왕은 시문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대아당(大雅堂)이라는 건물도 있다. 이곳에는 굴원(屈原), 도연명(陶淵明),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소식(蘇軾), 육유(陸游), 왕유(王維), 이상은(李商隱) 등 존경받는 중국의 역대 시인 12명의 조각상이 설치돼 있다. 매년 정월에는 각계의 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두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연다고 한다.

한편 이 두보초당에서 리커창(李克强) 중국 국무원 총리가 2019년 12월24일 문재인 한국 대통령 및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초청해 한·중·일 협력 20주년 기념행사를 열기도 했다. 리 총리는 이곳을 함께 둘러보며 "두보는 초가집에 살면서 백성과 나라를 마음에 품었다"면서 "그가 쓴 유명한 시 구절 '어떻게 하면 천만 칸의 넓은 집을 구하여, 널리 세상의 가난한 선비들이 모두 웃게 할까(安得廣廈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顔)'는 시인의 위대한 포부와 숭고한 인간애를 표현했다"라고 말했다. 두보의 시 '초가집이 가을바람에 부서져 부른 노래(茅屋爲秋風所破歌)'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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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초당에 있는 두보 사당 '공부사(工部祠)'. 두보가 4년 정도 살았던 초당을 중심으로 조성된 두보초당은 중국 쓰촨성 청두에 있다.


◆시성 두보

'시선'으로 불리는 이백(702~ 762년)이 젊은 시절부터 한시와 기행으로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것에 반해서, 두보는 죽어서야 그의 시와 인물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아 '시성'으로 추앙 받았다.

58세에 죽은 두보는 언제나 곤궁한 생활을 이어갔다. 관운도 없어서 가난에 시달렸으며, 죽을 때도 배 안에서 허기에 굶주리다 마지막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위대한 민중 시인이지만, 재능이 있어도 운이 없었다. 올곧은 성격으로 직언을 서슴지 않아서 모처럼 잡은 기회도 놓치고 결국 고난 속에서 일생을 마친 것이다.

죽고 나서 그의 시는 특히 가치를 인정받았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의 한유와 백거이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북송 시기 왕안석과 소동파에 의해 칭송됨으로써, 중국 최고의 민중 시인이자 시성으로 현재까지 불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두보는 "나의 시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만두지 않겠다(語不驚人死不休)"라고 했다. 그가 얼마나 치열한 작가 정신을 가졌고 작품에 많은 공력을 들였는지 말해준다. 그의 시에는 나라를 생각하고 대중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배어 있다. 두보는 꿈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채 평생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는데, 그런 마음도 절절하게 표현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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