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명필이야기 21] 행촌 이암, 필획이 굳세고 장중…동방인 중 조맹부 필법 정신 얻은 유일한 사람 칭송

  • 김봉규
  • |
  • 입력 2022-08-12   |  발행일 2022-08-12 제34면   |  수정 2022-08-12 09:01

2022080801000229600008681
이암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 전액(篆額) 탁본.

이암(李巖·1297~1364)은 고려 후기 서예가. 호는 행촌(杏村).

고려 시대 서예사에 있어서 가장 큰 자취를 남긴 인물로 탄연(坦然)과 이암을 꼽는다. 탄연은 통일신라 이래 고려 전기에 유행했던 서풍과 달리 특유의 미려한 필치로서 고려적 서풍을 이룩했고, 이암은 원나라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를 신속하게 수용해 여말선초의 서예를 이끌었다. 이암은 조맹부체의 연미한 단점을 보완해 필획이 굳세고 장중한 글씨를 선보였다.

이암의 대표적 필적으로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가 꼽힌다. 강원도 청평산 문수사에 세워졌던 비석으로, 이암이 31세 때 쓴 글씨를 새긴 것이다. 비문은 1327년 3월 원나라 황후가 보낸 사신들이 와서 성징(性澄) 스님 등으로부터 진상 받은 대장경을 문수사에 귀속시키고, 아울러 만 냥의 돈을 시주하면서 황태자와 황자의 생일에 승려들에게 공양하며 불서를 열람토록 했다는 사실을 김이(金怡) 등이 충숙왕에게 아뢰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비석은 성징 스님과 원나라 사신의 주도로 그해 5월 세워졌다. 행서로 쓴 문수사장경비의 글씨는 조맹부의 신수(神髓)를 얻었다는 평을 듣는다. 비석은 오래전에 파손되어 파편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이제현(李齊賢)의 '익제난고(益齋亂藁)'에 그 전문이 실려 있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등에 그 탁본이 실려 있다.

조선 초기의 문인 서거정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렇게 적고 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조맹부 등이 그 문하에서 놀았다. 왕이 귀국할 때 서적과 서화를 만 섬이나 싣고 와 조맹부의 필적이 동방에 가득 차게 되었는데, 우리 동방 사람 가운데 조맹부 필법의 정신을 얻은 사람으로는 행촌 이암 한 사람뿐이다.'

이암은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서화로는 묵죽화(墨竹畵)를 잘 그려 당시 문인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모견도' '화조구자도' '화조묘구도' 등의 작품도 유명하다.

회양부사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암은 경상도 고성군 송곡촌 앞 바닷가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17세 되던 1313년 8월에 문과에 합격했다. 비서성교감(秘書省校勘)을 시작으로 비서랑, 단양부주부, 밀직부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청평산에서 5년간의 은거를 마친 후 135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고 조정이 개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이암은 수문하시중의 사임을 왕에게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공민왕이 환도한 이듬해(1363년) 이암은 강화도로 은퇴했다. 선행리(仙杏里) 홍행촌(紅杏村)에 해운당(海雲堂)이라는 집을 짓고, 스스로 '홍행촌수'라고 불렀다.

한편 최근 이암의 친필 사경 작품이 있는 서첩이 공개돼 관심을 끌었다. 2018년 3월 이암의 친필 서첩 2점이 한국국학진흥원의 '고성이씨 문중 특별전'을 통해 공개된 것.

한국국학진흥원이 고성이씨 문중이 기탁한 자료 가운데 찾아낸 이 서첩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필사본이다. 1점은 화엄경 제26권 가운데 일부인 십회향품(十回向品) 제25를 직접 쓴 것이다. '행촌친필'이라는 표제가 붙은 다른 하나는 화엄경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일부를 필사했다. 십회향품을 쓴 서첩은 앞뒤 표지와 본문 4면이 남아 있고, '행촌친필' 표제가 붙은 것은 10절첩 가운데 2면만 남아 있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