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의 행복콘서트] 선비들의 피서…폭염에도 체면 중시해 발만 담그는 '탁족'…정신력으로 다스리는 더위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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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12   |  발행일 2022-08-12 제34면   |  수정 2022-08-12 08:01
폭포 바라보는 '관폭' 달 감상 '관월'
더위 이기는 것도 마음먹기에 달려
정약용이 더위 식히는 여덟가지 일
대자리서 바둑 두기·연못 연꽃감상
폭염에도 자연과 동화 한가로운 삶

조영석-노승탁족
조영석 '노승탁족도'

사명대사는 우리나라 국민의 존경을 받는 대표적 고승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려 의병을 이끌고 큰 전공을 세우고, 전쟁 후(1604년)에는 국서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이뤄내고 포로 3천500명을 데리고 오는 등 맹활약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소강상태를 보이던 1594년 가토 기요마사가 있는 울산의 왜군 진중으로 네 차례 찾아가 일본군의 동정을 살폈는데, 이때 가토와 나눈 문답이 유명하다. 가토가 사명대사에게 "그대 나라의 보배는 무엇이냐"고 묻자, 사명대사는 "우리나라엔 보배가 따로 없다. 우리나라의 보배는 바로 당신의 머리다"라고 답했다. 가토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하자 사명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난리가 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우리 상황에 보배가 어디 있겠는가. 오직 그대의 목만 하나 있으면 조선은 전쟁 없이 편안할 것이니 당신의 머리를 가장 값비싼 보배로 여긴다." 이후 이 이야기가 퍼지자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설보(說寶)화상'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 사절로 갔을 때 있었다는 여러 가지 경이로운 일화 중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도쿠가와가 대사의 도력을 시험하기 위해 무쇠로 만든 방에 하루 머물게 하고 쇠가 벌겋게 달도록 불을 지폈는데, 다음 날 문을 열어보니 사명대사는 수염에 고드름이 달린 채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보통 단순한 야사로 치부하지만, 달리 보는 사람도 있다. 인간 정신력의 무한한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의미의 '일체유심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런 정신력은 견디기 어려운 폭염을 이겨내는 데도 필요하다.

이경윤_고사탁족도
이경윤 '고사탁족도'

◆탁족 이야기

무더위를 이기는 옛사람의 피서법 중 하나로 탁족(濯足)이 있다. 선비들이 특히 애용했던 피서법인 탁족은 의미 그대로 발만 물에 담가 씻는 것이다. 손과 마찬가지로 발은 온도에 민감한 부분이고, 특히 발바닥은 온몸의 신경이 집중되어 있으므로 발만 물에 담가도 온몸이 시원해진다. 체면을 중시해 함부로 옷을 벗고 물을 즐기지 못했던 선비들은 이런 탁족을 즐기면서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선비가 계곡이나 시냇가에 앉아 발을 물에 담그는 탁족을 즐겼던 데는 단순히 육체적 더위를 잊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 말고도 특별한 이유가 있다. 옛날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탁족'이라는 말 자체도 여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바로 굴원(屈原·기원전 343~기원전 278)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이다. 중국 전국시대 때 초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조정을 떠난 굴원이 자신의 심사를 어부와의 대화 형식으로 담은 글이다.

굴원은 세상을 등지고자 마음을 먹고 멱라수 주변을 방황하다가 어부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마지막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다.

굴원이 어부에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새로 머리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라고 하였소. 어떻게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상수(湘水)의 물결에 뛰어들어 강의 물고기 배 속에 장사 지내질지언정 어떻게 희고 흰 순백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

그러자 어부가 빙그레 웃고는 노를 저어 떠나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으면 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면 된다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이런 이야기가 담긴 탁족은 육체적인 피서법일 뿐만 아니라, 정신 수양의 도구이기도 하다. 선비들은 산간 계곡에서 탁족을 하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씻기도 했던 것이다.

탁족은 그림 소재로 애용되기도 했다. 그중 이경윤의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가 유명하다.

물이 많이 흐르는 시냇가에서 탁족을 즐기는, 한가롭고 편안한 모습이다. 가지가 드리운 고목 아래 나이 든 사람이 홀로 물가에 앉아 물에 발을 적시고 있다. 저고리 옷자락 풀어헤치고 가슴과 불룩한 배를 드러내고 있다. 물이 차가운지 오른발로 왼 다리 종아리를 문대고 있다. 옆에는 동자가 커다란 손잡이가 달린 병을 들고 서 있다. 술병인 듯하다. 고목은 새싹이 돋고 있고, 하얀 꽃송이들도 보인다. 여름은 아닌 모양이다.

이 그림은 선비들이 꿈꾸었던 자연과의 동화, 은둔한 군자의 삶을 이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경윤은 시동과 큰 나무 없이 혼자 시냇가 바위에 앉아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또 다른 탁족도를 함께 남기고 있다. 옷차림도 더 단정해 담담한 분위기를 더하는 그림이다.

이경윤은 고사(高士)와 산수를 함께 구성한 그림을 많이 남기고 있다. '탁족'을 비롯해 달을 감상하는 '관월(觀月)', 거문고를 연주하는 '탄금(彈琴)', 폭포를 보며 호연지기를 기르는 '관폭(觀瀑)' 등이 있다. 선비들이 '정신적 더위'를 다스리는 방법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탁족과 관련, 고려 후기 문인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탁족부(濯足賦)'라는 글을 남겼다. 그 일부다.

'나물 먹고 배불러서 손으로 배를 문지르고, 얇은 오사모(烏紗帽) 젖혀 쓰고 용죽장(龍竹杖) 손에 짚고 돌 위에 앉아 두 다리 드러내어 발을 담근다. 손으로 한 움큼 물을 입에 머금고 주옥(珠玉)을 뿜어내니 불같은 더위 도망치네. 먼지 묻은 갓끈도 씻어내고 휘파람 불며 돌아오니, 시내 바람 설렁설렁 여덟 자 대자리에 조그마한 영목침 베고 꿈속에 흰 갈매기와 희롱하니 좁쌀이야 익거나 말거나.'

다산 정약용은 1824년 여름 '더위 식히는 여덟 가지 일(消暑八事)'을 남겼다. 그중에는 '시원한 대자리에서 바둑 두기' '서쪽 못에 핀 연꽃 감상(西池賞荷)' '동쪽 숲에서 매미 소리 듣기(東林聽蟬)' '달밤에 탁족 하기(月夜濯足)' 등이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촌 폭염의 수위도 갈수록 높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견뎌내기 쉽지 않을 폭염을 이길 수 있는 정신력도 높여가야 할 것 같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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