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존재하는 것에 대한 동의

  • 고명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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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8-15 07:43  |  수정 2022-08-15 07:49  |  발행일 2022-08-15 제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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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재 (시인)

"도토리/ 떨어져 가라앉네/ 산의 연못"(시키). 참 이상하다. 왜 이 짧은 하이쿠(일본 고유의 단시)를 보는 것만으로, 마음은 순식간에 평안해지는가. 가끔 일상이 지치고 힘겨울 때 나는 하이쿠를 펼쳐서 들여다본다. 이것이 주는 이상한 행복이 있다. 하이쿠는 계절을 중심으로 서술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형식 속에는 '사시사철(세계)에 대한 긍정'이 깔려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하이쿠는 텅 빈(空) 그대로,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이것이 세계에 존재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곧장 사라져버린다.

예를 들면 여름에는 이런 시가 제맛. "아침 이슬에/ 얼룩져 시원하다/ 참외의 진흙"(바쇼). 읽는 순간 여름의 싱그러움이 되살아나고 불지옥 같은 대구의 여름도 달리 보인다. 아니면 반대로 겨울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귤을 깐다/ 손톱 끝이 노란색/ 겨울나기"(시키). 아주 짧은 몇 문장만으로도 우리는 소소한 겨울의 기쁨으로 들어선다.

물론 사무치게 외롭고 절절한 순간도 있다. "쇠약함이여/ 치아에 씹히는/ 김에 묻은 모래"(바쇼). 나이 들고 병든 시인이 모래를 씹었을 때 몸과 혼은 얼마나 저릿했을까. 그럼에도 하이쿠는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이런 순간도 생에는 있다는 걸 보여줄 뿐.

"'주장은 아무도 납득시키지 못한다.' 월트 휘트먼도 주장은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주장이 아니라 밤공기에 의해서, 바람에 의해서, 별을 바라보는 것에 의해서 납득하게 되는 것이겠죠."(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말' 中) 그렇다. 늙은 소설가의 말처럼 우리는 주장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다는 걸 느낌으로써,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러니 이런 시를 자꾸 다시 보게 된다. "나무를 쪼개 보아도/ 그 속에는/ 아무 꽃도 없네"(오니쓰라). 꽃을 분석하지 말고 그냥 안을 것. 충분히 향기 맡고 눈앞의 존재를 바라볼 것.

이렇게 하이쿠는 대단한 걸 추구하거나 하나의 시각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존재한다.

"하이쿠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동의입니다. (중략) 하이쿠의 붙잡을 수 없는 특징은 분명 선(禪)과 관계가 있습니다. (중략) 하이쿠란 붙잡으려고 하지 않는 벽 위의 가벼운 긁힌 상처입니다. 하이쿠에서 나는 아무것도 붙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각적인 굽이들이 있고, 현실계의 섬광에 대한 행복한 동의, 감정적 굽이들에 대한 동의가 있습니다."(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中)

이 말을 좀 더 쉽게 풀어볼까. "봄비 내려/ 벌집 타고 흐르네/ 지붕이 새어"(바쇼). 이 시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여기에는 의미도 주장도 가치도 없다. 그러나 텅 빈 채로 이것은 충만하다. 그렇게 봄비가 온 세상을 가득 적신다.

고명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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