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철 칼럼] 이육사 기자상

  • 유영철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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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01 06:43  |  수정 2023-02-01 06:46  |  발행일 2023-02-01 제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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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이육사(1904~1944)는 시인이다. 독립운동가이다. 1944년 1월16일 40세에 북경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17번이나 투옥되면서 오로지 독립운동을 하며 명시를 남겼다. 이육사의 시를,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로 시작하는 시 '절정'은 사무치게 한다. '청포도' 또한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슬프게 한다. 훗날 월북한, 문학평론가이자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였던 아우 이원조가 1946년 처음으로 '육사시집'을 발간, 세상에 알리게 됐다.

이육사 문학상은 의미가 있다. 친일 행적이 전혀 없는, 댓살로 살점을 뜯어내는 고문도 갖은 회유도 이겨낸, 강철보다 강인한 이육사의 삶과 그의 시는 이육사 문학상(2004년 1회)을 제정하기에 충분했다. 친일 문인 이름의 문학상을 받은 문인이 심사위원이 되고 그런 상을 받은 문인이 이육사 문학상을 받게 돼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문학상의 근원인 이육사의 시는 더욱 찬연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육사 기자상이 나왔다. 의아했다. 작년 9월 안동에서 제정돼 지난달 17일 제1회 이육사 기자상을 시상했다고 했다. 이육사도 1930년대 대구에서 중외일보 지국기자와 조선일보 지국기자를 잠시(1년7개월여) 했다(나무위키). 1919년 3·1운동 후 일제는 당시 '불법 언론'을 잠재우기 위해 문화정치 운운하며 1920년 동아·조선·시사신문 등 민간지 3개를 허가했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1978)) 창간 과정과 그 후 이들 총독부허가 신문들을 보면 언론창달의 허구성을 증명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일제하 뜻있는 기자들은 언론환경에 분노하고 좌절했다. 문학의 길로, 다른 길로 나아갔다. '이육사 기자'도 정론직필을 펼칠 수 없음을 분명 알았을 것이다. 잠시 적을 두면서 상징적인 시어의 시를 써서 신문·잡지에 발표했다. 일제는 소위 '민족언론'이 그토록 순응하고 협조해도 검열, 삭제, 정간 등 되풀이 탄압하다 종국에는 강제폐간(1940년)시켰다. 내선일체, 한글사용금지, 창씨개명까지 이어갔던 거다.

이육사 기자상을 구상했다면 일제 총독치하에서 기자 이육사가 기자로서 무엇을 했는지, 어떤 기사를 썼는지 살펴봤어야 했다. 언론창달 기여도와 기자정신을 구체적으로 검토했어야 했다. 기자(기사)로서 내세울 게 있는가. 본사 기자도, 지국기자도 언론창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언론은 언론이 아니었다. 이육사의 시가 없다면 이육사 문학상도 제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절정' '광야' '청포도' 같은 기사가 없는 '이육사 기자상'은 근원이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일제 강점기에도 흔들림 없이 정론직필을 펼친 기자 이육사의 드높은 저널리즘 정신을 기리고자~"한다는 이육사 기자상 모집공고문을 뒤늦게 보면서 그 문구에 기가 막혔다. 미화· 왜곡· 근거 없는 서술(조작)은 기자가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사업에 성공한 안동지역 전직 언론인이 중심이 되어 동향 출신 독립지사 이육사가 기자를 했다는 사실에 비춰 막연하게 언론도 숭고하게 했을 것으로 간주하고 거금 희사 기자상을 착상한 그 취지는 순박하나 실상은 너무 부합되지 않는 게 안타깝다.

광복 전 옥중에서 순국한 이육사는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한 항일투사였다. '이육사 기자상' 제정도 놀랄 일이지만 항일독립군의 반대편인 일제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의 편에서 그를 옹호하는 칼럼을 쓴 기자가 제1회 수상자라는 것도 놀랄 일이다. 이제 이육사 이름에 누를 끼치지 말자.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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