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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최소영기자 thdud752@yeongnam.com |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20년 넘게 천직으로 여기던 보육교사를 그만두고, 친정 오빠의 사업을 도와주고자 사무실에 앉아서 발주, 거래처 소통, 입출금 진행, 계산서 발행을 도맡았다. 2주 동안 매일 울었다. 어린이집 아이들이 보고 싶고, 경리 업무에 필요한 용어들이 생소했다. 어린이집에서 일할 때는 하루 종일 잠시도 엉덩이 붙일 틈 없이 아이들과 몸으로 부대끼며 생활했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니까 눈도 따갑고 어깨도 아팠다. 경리 업무가 익숙하지 않아 오빠만 아니면 다시 어린이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이 일도 익숙해지니까 나름대로 재미가 생겼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 옆에는 택배업을 하는 회사가 붙어있었다. 내가 일을 하는데 택배 사무실 실장님이 택배를 포장하고 선별하는 현장에서 아르바이트 할 사람을 구해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대학부터 직장 다닐 때까지 대구 칠곡3지구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동네 지인을 소개하는 일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아래층 사는 동생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고 동생도 흔쾌히 일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 동생의 불편이 걱정돼 내 자가용으로 같이 출퇴근을 하자고 제안했다. 같이 하려면 내가 출근 시간보다 일찍 나서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동생을 배려하고 싶었다. 동생은 매일 출퇴근을 내 차로 하면서 고마웠는지 시골에 잠깐 다녀올 때마다 양파, 파, 고구마 등 농산물을 싸 왔다. 나는 동생 마음이 편해지길 바라며 고맙게 받았다. 현장서 택배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생은 생각보다 일이 힘들지 않고 시급도 괜찮다면서 기뻐했다.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 줘서 고맙다고 출퇴근 차 안에서 때마다 얘기한다. 또 택배회사 실장님도 동생이 손이 빠르고 성실하다면서 좋은 직원을 소개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큰일도 아닌데 어쨌든 두 사람 모두에게서 칭찬을 받으니 내심 기분이 좋았다.
한두 달이 지났을까. 어느 토요일 아침 일찍 동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어떡해요?"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소식인 것 같아 이유를 물었다. 동생은 "신랑이 어제 저녁부터 목이 아프고 춥다고 해서 오늘 아침에 코로나19 검사를 했는데, 양성이래요. 당분간 언니 차로 같이 출퇴근을 하기는 좀 그렇고 제가 알아서 버스 타고 갈게요"라고 했다.
나는 동생에게 "버스 타고 출근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릴 텐데 힘들어서 어떡해? 아무쪼록 신랑 간호 잘 해주고 나머지 식구도 전염되지 않게 조심해"라는 안부를 전하며 짧은 통화를 마쳤다.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겠다는 얘기를 먼저 해준 동생이 내심 고마웠다. 우유부단한 내 성격상 신랑이 격리해제될 때까지는 버스를 타고 다니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 끙끙 앓았을지도 모른다.
월요일 아침, 동생에게 또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온 가족 4명이 코로나19에 확진됐다는 소식이었다. 동생의 목소리가 많이 안 좋았다. 많이 아픈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 아르바이트를 못 할 것 같아요." 걱정하는 동생에게 나는 "지금 아르바이트가 중요해? 실장님께는 내가 상황 설명할 테니 걱정 마! 아프진 않아?"라고 안심시켰다. 그랬더니 동생이 "신랑은 컨디션이 나쁘진 않은데 저랑 상희, 상원이가 많이 심한 것 같아요. 목이 너무 따갑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아요."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나는 동생에게 "장 볼 게 있으면 문자를 넣어줘. 퇴근길에 장을 봐서 집 현관문 앞에 놔둘게"라고 제안했다. 동생도 고맙다면서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날 저녁, 반찬을 만들면서 동생네 가족이 식사는 제대로 했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밑반찬을 몇 가지 만들었다. 우리 가족 먹을 반찬을 만드는 김에 양만 조금 더 늘리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반찬을 만들 때 쪼르르 달려와 "엄마, 내가 먼저 간 볼래"하며 입을 벌리던 중학생 둘째 아이는 갑자기 양이 많아진 반찬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엄마, 왜 이렇게 많이 해?"라는 둘째에게 "상희 형아네 집에 좀 가져다 주려구. 식구들 모두 코로나 확진이라 많이 아프대. 아파서 반찬도 못 만들까 봐 우리 반찬 만들면서 조금 더 한 거야"라고 대답했다. 평소 개인주의 성향이 조금 있는 고등학생 딸이 "상희 엄마가 그렇게 해달래? 그것도 아닌데 왜 엄마는 힘들게 그렇게까지 해? 알아서 시켜드시겠지"라고 응수했다. 우리 딸의 말에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평소 나의 행동에 우리 신랑도 오지랖이라는 표현을 가끔 한다. 나는 배려라고 한 행동이지만, 상대방이 불편해하면 그건 배려가 아니라고. 처음 신랑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땐 상당히 서운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미리 만든 반찬을 용기에 담아 동생네 집 현관문 앞에 살짝 두고 출근을 했다. 혹시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 때문에 깰까 봐 발걸음도 조심조심 뗐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 출근길도 즐거웠지만, 이날의 출근길은 뭐라고 표현하긴 힘든 뭔가 뿌듯하고 더 기분이 좋았다. 회사에 도착해 급한 오전 발주를 넣고, 동생에게 문자를 넣었다. '애경씨? 몸은 좀 어때? 다름이 아니라 현관문 앞에 종이가방 하나 있을 거야. 우리 식구 먹을 반찬 만들면서 조금 더 했어. 한두 끼 식사할 정도는 될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얘기해줘.'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동생에게 너무너무 감동했다면서 문자가 와있었다. 아직 목소리가 쉰 상태라 전화하긴 힘들어서 문자를 한다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라고 너무 고맙다면서 잘 먹겠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한 작은 행동이 상대방에게 그렇게까지 감동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인사를 받으려고 한 행동도 아니고, 내 마음이 그냥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동생에겐 엄청난 감동이었다니!
문자를 읽고 있던 내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오후 업무를 보고 있는 중 카카오톡으로 선물이 도착해 확인해보니 '언니 오늘 너무 고마워요. 커피 맛있게 드세요'라는 카드 메시지와 함께 아랫집 동생이 아이스아메리카노 2잔을 보냈다. 퇴근 후 나는 가족에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했고, 자주 오지랖이라며 핀잔을 주던 우리 신랑도 잘했다고 이웃사촌인데 아플 땐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칭찬을 해줬다. 우리 딸도 아빠의 말에 한 표를 더하며 나에게 '엄지척'을 날려주었다.
일요일 저녁, 현관 벨이 울리는 소리에 인터폰을 확인하니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상희 아빠였다. 확진 후 일주일이 지났으니 격리해제가 된 모양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상희 아빠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뒤에 숨겨두었던 하얀 비닐봉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집사람이 갖다 드리라네요. 뭔지는 모르겠어요."
비닐봉지에 적혀있는 글씨를 들여다보니 '평화시장 닭똥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구 평화시장이 닭똥집으로 유명한 건 알고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칠곡3지구와 거리가 있어 자주 찾아가서 사 먹지는 못한다. 동생에게 전화를 하자 동생 신랑이 평화시장 가서 우리 집 것도 준다며 사서 왔다는 것이었다. '상희 아빠가 고마웠다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닭똥집 비닐을 건네던 그 손에 그 마음이 들어있었구나!'라고 생각하며 나도 맛있게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의 작은 행동이 이렇게 돌아올 것이라고 바라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의 행동이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준 것 같아 행복한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 같다.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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