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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살로메 (소설가) |
나이스한 개자식, 이란 말이 유행이다. 화제의 K드라마 '글로리'에서 남주인공 캐릭터를 소개하는 한마디이다. 짧은 직설화법 속에 아이러니까지 담아낸 작가적 통찰이 부럽다. 개인적으로 이 말이 깊게 와닿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읽은 소설 '스토너' 덕분이다. 주인공 스토너는 예의 소개된 남주인공과 반대되는 개성을 부여받은 인물이다. "개자식이 덜돼서 진짜로 출세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작가 존 윌리엄스는 묘사한다.
가장 순수한 피난처라고 생각했던 대학 내에서, 오히려 다사다난한 갈등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주인공 스토너. 교수 사회의 단면을 통해 관계의 어려움과 소통의 뻑뻑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우직하다 못해 아집이 보이는 스토너 교수는 '정무 감각'이 전무한 인물이다. 정무 감각은 행정이나 정치에만 통용되는 게 아니다. 사람살이 전반에 요청되는 삶의 지혜이다. 정무 감각의 과함 유무에 따라 개자식이 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이 될 터인데, 스토너는 눈치나 줄서기 앞에서는 제 개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 태도는 개자식의 혐의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나이스'한 삶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매혹으로 가득 찬 거리가 아니라, 찌질함의 뒷골목을 서성이다 씁쓸히 스러지는 인물이 스토너이다.
스토너에게는, 무례한 제자를 품을 아량도 없고 유별난 아내를 대화의 장으로 이끄는 기술도 부족하다. 오히려 특별한 사랑이라 믿으며, 시간 강사와 부적절한 만남을 갖기도 한다. 학과장, 학장, 총장으로 이어지는 위계 속에서 주도권을 쥔 로맥스 학과장은 은근히 스토너를 괴롭힌다. 알짜배기 강좌는 배정해주지 않고, 학생들 앞에서 무시하고, 학장이나 총장 앞에서 뒷담화를 함으로써 스토너의 자존감에 상처를 준다.
독서도 궁극은 사람살이를 고찰하는 행위이다. 어떤 소설은 공감을 넘어 체화된다. 스토너는 그 흔한 복선도 맥거핀도 없다. 반전의 묘미조차 꾀하지 않은 채, 덤덤한 인생 다큐를 시간적 순서로 배열해놨을 뿐이다. 그런데도 진짜배기 소설로 읽힌다. 어찌할 수 없이 버텨야 하는 삶, 그 피로함의 무게에 대해 독자들은 각자 나름의 경험치를 보유하고 있다. '외교적인 요령'이라고는 모른 채, 답답하게만 살다 간 스토너가 보통 사람의 한살이와 너무나 닮아있음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인간은 태생이 자기 본위이다. 때로의 과한 욕망과 이기심이 동료의 처지를 가십거리로 만들고 그 영혼을 잠식시켜 버린다. 정무 감각을 과하게 낭비한 누군가가 그렇게 개자식이 되어가는 동안, 그것을 활용할 줄 모르는 스토너는 운명처럼 고스란히 세파와 맞닥뜨린다. 그제야 사랑이 은혜로만 충만하다거나, 환상이란 무대가 쉽게 실현되는 것이 아님을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스토너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신화적 인물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올곧은 스승도 아니다. 깨지고 다치기 쉬운 보통 사람이다. 치열하게 살려면 정치적이어야 하고, 내려놓는 삶을 선택하면 자칫 무기력해진다. 스토너는 후자처럼 살았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하지는 않았다. 대개의 우리 일상이 그렇듯, 권태로운 초연함으로 제 삶의 무게추를 묵묵히 견뎌냈다.
일견 로맥스처럼 '나이스한 개자식'이 성공하는 세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직한 비타협의 나날이 신통치 않은 삶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고지식하지만 단단하고, 황량하지만 성실했던 스토너를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불안하고 두려운 삶에 노출된 모든 스토너들을 향해 작가 대신 말하련다. 나이스한 고속도로보다는 울퉁불퉁한 산책로가 훨씬 더 가치 있고 아름답다고.
김살로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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