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직구 핵직구] 50억원의 무게

  • 이재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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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15  |  수정 2023-02-15 06:44  |  발행일 2023-02-15 제27면
[돌직구 핵직구]  50억원의 무게
이재동 변호사

우리 지역의 한 후배 변호사가 곽상도 전 의원에 대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무죄 판결을 비판하면서 '50억원의 무게를 간과한 판결'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을 보고 크게 공감이 되었다. 이 사건이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퇴직금이라는 명목으로 지급된 금액의 엄청남이었다. 일반인들은 한 푼도 쓰지 않고 평생을 고생하며 모아도 그 근처에도 이를 수 없는 돈이 국회의원을 아버지로 둔 갓 서른의 젊은이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지급되었다는 사실은 허탈감과 함께 큰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양(量)이 질(質)을 결정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양과 질은 분명히 대립되는 별개의 개념이지만 양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 증가하면 그 본질을 변화시킨다는 뜻인데, 경제철학자 카를 마르크스가 산업혁명에 따른 경제규모의 폭발적 증가가 그 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령 형법에서 타인의 재물을 훔치는 것을 절도죄로 처벌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훔친 자를 범죄로 입건하여 처벌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부터 절도죄에서 규정한 '재물'의 의미를 띠는지에 관하여 명문의 규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금액의 기준선은 분명 있을 것이다.

이번 곽상도씨에 대한 판결에서 판사는 그 돈이 퇴직금이나 성과급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과다하다고 설명하였다는데, 50억원이라는 돈은 그냥 과다한 퇴직금으로 볼 것이 아니라 퇴직금이 '아니라고' 판시했어야 했다. 정상적인 퇴직금의 2백 배가 넘는 돈은 그 본질이 퇴직금이 아니라 뭔가 다른 목적으로 주고받은 돈으로 변화한 것이다. 어느 정도의 금액에서 퇴직금이 아닌 뇌물로서의 성격으로 바뀔지에 관하여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50억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은 6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근무한 젊은 직원의 노력에 대한 대가로서의 본질을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하는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그러므로 이번 판결은 회색빛 법이론을 동원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건전한 상식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다. 50억이라는 낯선 숫자 앞에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살았다든지 구체적인 청탁에 관한 증거가 부족하다든지 하는 이유들은 다 구차해 보인다. 이론에 끼워 맞추기 위해 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는 건전한 상식에 부합하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이론이 존재하는 것이다.

곽상도씨나 그 아들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그 돈을 자신들의 만족을 위하여 아무렇지 않게 소비할 수 있게 된다면 누가 우리 사회가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누가 수사기관의 조사 결과나 법원의 판결에 진심으로 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 판결은 또 어떤 교수가 조국 전 장관의 딸인 학생에게 지급한 6백만원의 장학금을 아버지에게 부정하게 지급한 것으로 본 최근의 판결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사법에 대한 신뢰에 의문을 가지게 하였다. 판사는 개개인이 하나의 법원이다. 수많은 법원이 다 제각각의 정의관을 가지고 구구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국민은 재판을 복불복의 우연으로 여길 것이다.

천하제일 서울법대 로비에는 '정의의 종(鐘)'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는 현판이 걸려있다고 한다. 하늘은 멀쩡하기만 한데 정의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암담함을 느끼게 하는 요즘이다.이재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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