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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소설가) |
1926년 2월 만주 쑹화강 하류에서 교육운동을 하던 이상정이 활동 본거지를 내몽고 쑤이위안으로 옮겼다. "이 속에 타는 불은 저 님은 모르시고/ 서운히 가는 뒷모습 애석히 눈에 박혀/ 이따금 샘솟는 눈물 걷잡을 줄 없애라"라는 내용의 시조 '남대문역에서'를 조국 땅에 남기고 망명객이 된 지 약 9개월 만이었다.
쑹화강은 고구려 유리왕이 '황조가'를 부른 곳이다. "쑹화강"은 뜻글자 느낌이 훨씬 강렬히 다가오는 "송화강(松花江)"으로 발음할 때 유리왕의 절망이 한층 애잔하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이상정도 송화강 도도한 물길을 바라보며 유리왕 못지않게 슬픈 이별의 마음에 젖어 들었을까?
아마 그랬을 법하다. 본인이 육필원고에 남긴 표현대로 "정말 환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견디며 혼신을 바친 육영사업과 헤어지는 순간이었으니 어쩌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을 터이다. 그래도 이상정은 쑤이위안에서 "슬픔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을 수(한용운 '님의 침묵')" 있었다.
이상정은 쑤이위안에서 펑위상 국민혁명군 참모부 막료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 경력은 그가 중국 정규군 중장까지 오르는 기본 토대로 작용했다. 또 쑤이위안에 간 덕분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옥과 조우할 수 있었다. 같은 시점에 권기옥도 쑤이위안으로 왔던 것이다.
흔히 이상정은 임시정부를 크게 도운 중국군 장군 또는 이상화의 형으로 기억된다. 그는 항일결사 용진단 위원장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피체 위기에 쫓겨 압록강을 건넜다.
그 전에 이상정은 대구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을 열었고(1921년), 당대 최고 잡지 '개벽'에 시조를 발표함으로써 대구 최초의 현대시조 시인으로 역사에 남았다(1922년).
"백두 금강 태백에 슬픔을 끼고/ 두만 압록 양강 물결에 눈물 뿌리며/ 남부여대 쫓겨온 백의동포를/ 북간도 눈보라야 울리지 마라/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일크스크 찬바람 살을 에이고/ 바이칼 호수에 달이 비칠 때/ 묵묵히 앉아 있는 나의 심사를/ 날아가는 기럭아 너는 알리라/ 굽이굽이 험악한 고향길이라/ 돌아가지 못하는 내 속이로다"
오늘날 우리는 이상정이 그토록 그리워한 땅에서 평온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상정이 보여준 멋과 용기로 삶을 가꿀 의욕도 없이 '묵묵히 앉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말 없는 다수'의 일원이라는 점을 자랑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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