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易地思之] 왜 '중도'를 위한 '밥그릇 싸움'은 없나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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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28 06:56  |  수정 2023-03-28 06:56  |  발행일 2023-03-28 제22면
한국 정파저널리즘 전성시대
정치 편향성·정치 색채에 따라
강성지지자 욕구에 의존하는
증오와 혐오 팬덤정치의 폐해
거대 양당 저질싸움 지양하고
중도층 위한 정책을 확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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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2 언론수용자 조사'에 따르면 뉴스 이용 매체에서 종이신문 이용률은 9.7%에 불과했다. 뉴스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골라서 소비하는 디지털 시대를 웅변해주는 우울한 수치다. 왜 우울한가? 정치뉴스의 편식이 야기하는 갈등과 분열 때문이다.

종이신문이 뉴스를 얻는 주요 매체였던 시절엔 편식을 하더라도 자신이 싫어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생각과 주장을 접할 기회와 가능성이 꽤 있었다. 클릭이나 터치를 하지 않더라도 신문을 넘기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기사 제목마저 건너뛰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걸 아는 정치인들은 상대편을 공격하더라도 최소한의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살아있는 비판을 하는 게 효과가 있다고 보았으며, 그래서 정치담론의 질적 수준을 어느 정도나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군중집회에서 선동 구호를 외치는 식의 단순하고 과장된 비난 공세를 퍼붓는 게 더 낫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뉴스를 편식하는 사람들이 그런 메시지를 원하는 걸 어이하랴. 이젠 신문마저 그런 변화된 환경에 맞춰 정파성의 농도를 더 짙게 하고 있다. 신문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보라. '정치전쟁' 전문 채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각자의 정치적 색깔에 따라 강성 지지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에 여념이 없고, 이는 다시 종이신문에 영향을 미쳐 '정파저널리즘의 전성시대'를 꽃피우고 있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은 "정치적인 언어는 주로 완곡어법과 논점회피, 그리고 순전히 아리송한 표현법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지만, 그건 70여 년 전의 영국 사정일 뿐이다. 현재 한국에서 정치언어는 상대편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극대화시켜 표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걸 '정치적 현상'으로만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경제적 현상'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미국의 폭스뉴스가 잘 입증해 보였듯이, "정치적 편향성은 이익이 되는 장사"다. 극단적인 정치적 편향성을 파는 유튜브 채널은 '이익이 되는' 수준을 넘어 속된 말로 '대박을 치는' 장사가 되었다. 어떤 미디어건 시장에서 성공하려면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강성 지지자들을 단골 고객으로 붙잡아 두어야 한다. 그들은 시간을 아끼지 않고 열정이 흘러넘칠 뿐만 아니라 돈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제한된 미디어 채널로 인해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던 시절엔 미디어와 고객의 관계에서 주도권은 미디어에 있었다. 그러나 공급의 출구를 무한대로 늘린 디지털 혁명시대의 주도권은 고객에게 넘어갔다. 마음에 맺힌 게 많은 강성 지지자들은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화끈한 담론을 좋아한다. 특히 반대편 정당과 정치인을 향해 증오와 혐오의 독설을 퍼붓고, 자기 진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후안무치 능력이 뛰어난 정치인을 사랑한다. 반대편에서 욕을 많이 먹을수록 사랑의 농도도 짙어진다.

강성 지지자들의 그런 욕구를 잘 충족시켜주는 정치인들의 후원금 계좌는 꽉 찰 뿐만 아니라 다음 공천은 이미 따놓은 거나 마찬가지다. 강성 지지자들이 정당 내의 권력구조를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유리하게끔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호전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실력행사를 벌이면 벌벌 떠는 정당 지도부가 어찌 그들의 요구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이제 정치인의 능력은 강성 지지자들로 구성된 팬덤을 누가 더 많이, 잘 관리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팬덤정치는 반대편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먹고 살기 때문에 정당을 극단으로 몰고 가기 마련이다. 선거 막판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중도 유권자들은 그런 극단적인 모습에 질린 나머지 팬덤정치의 폐해가 덜한 정당에 더 많은 표를 던짐으로써 응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팬덤정치가 약화되는 건 아니다. 정당 내부의 경쟁에선 여전히 팬덤정치가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 양대 정당이 정치적 자원을 독식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경제적 현상'이다. 우리는 정치판에서 '논공행상'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쓰지만, 이건 좀 위선적이다. 정치는 억대 연봉, 기사 달린 자가용, 비서와 보좌관이 거저 굴러 들어오는 '횡재'를 두고 벌이는 '밥그릇 쟁탈전'이기도 하다는 걸 누가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다 아름다운 명분을 내세우긴 하지만 그런 '밥그릇'이 보장되지 않는데도 명분만을 위해 헌신하거나 희생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러니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좋다. 이걸 인정하면 온갖 모순과 결함에도 불구하고 거대 양당 정치가 지속되는 수수께끼도 쉽게 풀린다.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밥그릇'이다. 지식인들조차 좋든 싫든 두 거대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해야 발언권과 영향력이 생기고 그걸 밑천 삼아 각종 공적 자리를 챙길 수 있는 상황에서 중도를 택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말이다.

아주 괜찮던 사람도 정치권에만 들어가면 극단적 당파싸움의 졸(卒)로 전락하는 것도 바로 그런 '밥그릇' 문제 때문이라는 건 이젠 공개된 비밀이 아닌가. 특히 대학교수나 언론인을 하다가 정관계로 진출한 이들을 보라. 늘 옳은 말만 하던 이들마저 정치인의 옷을 입는 순간 추태를 보이는 일에 앞장서는 건 그만큼 '밥그릇' 문제가 절박하다는 걸 말해주는 증거가 아닐까?

정당 내부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쫓겨난 사람들을 보라. 언론도 사회도 그런 사람들에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하다. 늘 정치권을 향해선 돌을 던지면서도 그런 정치권을 바꿔 보겠다고 나섰다가 피해를 본 사람들에겐 각자 알아서 책임지라는 식으로 외면해버리는 사람들에게 과연 정치에 침을 뱉을 자격은 있는 건지 모르겠다.

미국 작가 앰브로스 비어스는 "정치는 원칙의 경쟁으로 위장하는 밥그릇 싸움"이라고 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반론을 펼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중도를 키우려는 밥그릇 싸움은 없나? 왜 장삿속에 밝은 탁월한 사업가들이 거대 양당 어느 한쪽에 붙어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고 하는가? 거대 양당이 벌이는 저질 싸움을 공격해 싸움의 다양성이나마 실현하는 걸 주업으로 삼는 미디어를 성공시키는 사업가를 보고 싶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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