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한국에 가장 필요한 '시민의회'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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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15 06:59  |  수정 2023-05-15 07:00  |  발행일 2023-05-15 제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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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석윤 논설위원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는 몇 안된다. 대부분 민주국가다. 민주주의가 대세가 된 건 당연해 보인다. 더 나은 정치제도를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근대 민주주의 작동 방식인 대의(代議)정치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알다시피 대의정치는 시민들이 대표를 뽑아 권력을 위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정치는 일종의 권력 대행 서비스인 셈이다. 하지만 서비스에 문제가 많다. 여러 이유가 있다. 권력 주인(시민)과 대리인(정치인)의 상하 관계 역전이 대표적이다. 정치인이 주인 행세를 하며 시민 위에 군림한다. 국민과 국가 이익보다 사익을 좇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사이비 민주주의로 변질된 정당정치 폐해는 심각하다.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레비츠기 교수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란 책에서 이를 잘 지적한다. "정치인들은 당파적 이익을 위해 못 하는 일이 없다. 행정·사법 등 권력 기관을 장악하고, 언론을 억누르고, 헌법과 법률까지 주무른다."

정치인의 권력 오남용이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한 지 오래다. 전 세계적인 고민거리다. '주권자가 소외되는 정치가 어떻게 민주주의인가?' 당연히 제기될 만한 문제의식이다. 뒤늦게나마 이에 대한 공감대가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이 간접 민주주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채택한 게 '시민의회'다. 프랑스·영국·독일·벨기에·아일랜드 등 대다수 국가가 운영 중이다. 시민의회는 국가의 중요 정책 결정 과정에 국민이 직접 참여해 민주적이고 투명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

유럽에서도 프랑스 시민의회가 돋보인다. 시민사회 요구를 정치권이 수용해 2019년 도입됐다. 상·하원에 이은 '제3 의회'로 불리며 국가의 중대사 결정에 큰 역할을 한다. 안락사 합법화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2월 프랑스 정부의 시민의회 소집 요청에 따라 선발된 시민대표(185명)들은 3개월간 토론을 거쳐 "존엄사, 조력 자살 등의 적극적인 임종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 권고안을 수용해 '죽을 권리'를 보장하는 프랑스식 임종 모델을 만들기로 했다. 숙의 민주주의의 좋은 예다. 국회가 잘 작동하는 프랑스라고 해도 이처럼 민감한 사안을 정치권에만 맡겼다면 무난하게 합의됐을지 의문이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어떨까. 거대 양당이 함께 뭉개거나 아니면 싸움박질로 허송세월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이 경제, 문화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지만 정치는 예외다. 여전히 3류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하다. 정치가 민의와 따로 노는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됐다. 특히 국회를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특권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챙기면서 온갖 뻘짓만 한다. 가성비 세계 최악이다. 선량들이 내뱉는 '민생'은 립 서비스일 뿐. 돈 봉투 챙기고 코인 투자하느라 바쁜 의원도 많다. 이런 국회가 '민의의 전당'? 소가 웃을 일이다. '민폐의 전당'에 가깝다. 하지만 국회의 반민주주의 작태를 막을 방도가 사실상 없다. 우리나라야말로 시민의회가 필요한 이유다. 시민의회가 생긴다면 국회 특권 규제가 1호 안건이었으면 한다. 대의 민주주의는 관객 민주주의가 아니다. 시민의식이 깨어나야 진짜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다.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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