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시대공감] 주부 판타지는 영원할까

  •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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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26  |  수정 2023-05-26 07:00  |  발행일 2023-05-26 제22면
닥터 차정숙 놀라운 시청률
20여년 경단녀가 의사라는
비현실적 내용 시청자 열광
주부들 억압된 처지 계속땐
사이다 판타지 인기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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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 문화평론가

JTBC 주말드라마 '닥터 차정숙'이 시청률 18.5%를 찍으면서 종편 드라마로서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다. 30%대 시청률이 기본이라는 KBS 주말드라마마저 19%대로 하락할 정도로 드라마 초약세기에 나온 성적이라 더욱 놀랍다.

'닥터 차정숙'에선 여주인공인 차정숙이 대학병원 전공의가 된다. 그런데 차정숙은 20여 년간 전업주부였다. 의대를 나와 인턴까지 마치긴 했지만 그건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현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으면서 경력이 완전히 단절돼 오로지 집안 살림에만 20여 년간 몰두해 왔다. 갑자기 대학병원 전공의가 되는 건 개연성이 떨어진다.

바로 그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 그게 이 작품의 성공을 견인했다. 개연성은 우리 현실에 이미 충분히 넘친다. 현실에 없는 건 판타지다. 경력 단절된 전업주부가 갑자기 대학병원 전공의가 된다는 비현실적인 판타지가 현실에 치여 살던 시청자를 열광시켰다.

차정숙의 남편은 대학병원의 촉망받는 교수로 번듯한 엘리트 의사다. 그는 부인을 돌을 보듯 하며 무시하고 병원의 동료 여성 의사와 바람을 피운다. 차정숙의 시어머니는 빌딩을 가진 자산가로 변변치 않은 집안의 며느리와 사돈까지 무시한다. 그렇게 주눅 들어 살던 차정숙이 어느 날 각성해 대학병원 의사로 우뚝 서면서 남편이 그녀의 매력에 새롭게 눈뜨게 된다. 남편은 뒤늦게 부인에게 매달리고, 망가진 모습을 보이게 된다. 고압적이던 시어머니는 아들의 불륜이 들통난 후 며느리 집안 앞에서 쩔쩔매기 시작했는데, 곧 투자실패로 빌딩을 잃을 위기에 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주부인 여주인공이 비현실적으로 성공하는 반면 남편과 시댁이 망가져 가는 드라마들이 반복적으로 성공한다. 이런 작품엔 사회활동을 시작한 여주인공 옆에 으레 연하의 꽃미남 엘리트가 나타나 남편을 '오징어'로 만드는데 '닥터 차정숙'에도 미국 출신 꽃미남 연하 의사가 여주인공 옆에 나타났다.

정말 비현실적인 판타지인데 주부들의 욕망이 투영됐기 때문에 '주부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과거 SBS '아내의 유혹'에선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여주인공이 얼굴에 점 찍고 변신해 남편을 유혹했다. 엘리트 여성과 바람피웠던 남편은 점 찍은 자기 부인에게 반해 매달리다 몰락하고 말았다. SBS '조강지처 클럽'에서도 전업주부인 부인을 무시하고 도회적인 여성과 바람피웠던 남편은 결국 몰락했고 부인에게 매달렸다. 시댁은 더 이상 며느리를 무시하지 못하게 됐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무기력하고,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무시당하던 전업주부가 일약 커리어우먼으로 성공하면서 남편과 시댁에 본때를 보인다는 설정이 주부 판타지의 핵심 골격이다. 이 설정이 드라마 시청률을 보장하는 황금 설정이 됐다. '닥터 차정숙'은 처음부터 그렇게 흘러갈 거라고 예측이 됐고, 예측대로 흘러가자 매회 시청률이 폭등했다.

뻔히 예측이 가능한 전형적인 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성공하는 건 그리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오죽했으면'이라는 생각도 든다. 얼마나 경력 단절된 주부들의 열패감이 크고, 남편과 시댁이 그걸 몰라준 데 대한 서운함이 컸으면 그 마음을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대리만족으로 풀려 하겠는가. 이런 드라마에 대해 많이 나오는 시청평이 '사이다'다. 막혔던 속이 뻥 뚫린다는 이야기다. 비현실성이 클수록 현실의 답답함이 더 시원하게 뚫린다. 주부들의 억압된 처지가 계속 이어진다면, 그 속을 후련하게 풀어주는 사이다 주부 판타지의 인기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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