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올디스 벗 구디스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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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12 06:58  |  수정 2023-06-12 06:58  |  발행일 2023-06-12 제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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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논설위원

'클래식(classic)' 하면 흔히 서양 고전음악을 떠올린다. 이 말고도 '유행을 타지 않는 최고'라는 뜻도 있다. 스페인어로는 '클라시코(Clasico)'. '엘 클라시코'는 100년 넘게 펼쳐져 온 스페인 프로축구 레알 마드리드 대(對) FC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일컫는다. '영원한 세계 최고의 축구 경기'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클래식'이라는 말은 그래서 중후하고 정감이 간다.

대학 다닐 때였다. 털어놓기 부끄러운 고백이다. 급히 돈 쓸 일이 생겼다. 용돈은 이미 바닥난 처지. 부모님껜 염치불고다. 교재를 팔 수밖에 없었다. 대구시청 옆 헌책방을 처음으로 들른 계기는 그렇게 면구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가 필요해?" 책방 주인은 퉁명스러웠다. 그 말에 야코죽은 내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그 뒤론 같은 이유로 헌책방을 들르지 않았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근데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게 있다. 그 헌책방의 '냄새'다. 뭐랄까. 마음이 편안해지는, 인간미 가득한 냄새라고나 할까. 그 묵은 종이 냄새 때문에라도 헌책방엔 '클래식' 별호(別號)를 붙여주고 싶다.

오래전 소설책을 사러 가끔씩 들렀던 대구 남문시장 인근 헌책방 골목. 그곳에서 70년 넘게 자리해 온 월계서점이 매물로 나왔다는 보도가 최근 있었다. 경영난 때문이다. 안타깝다, 헌책방 단골은 아니었지만. 사라져 가는 '클래식'에 대한 단상(斷想)이리라. 오래전 대구엔 헌책방이 많았다. 대구역 굴다리를 비롯해 남문시장·대구시청 주변에 옹기종기 자리했다.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다. 몇 곳이 겨우겨우 간판만 달고 있다. 완전 소멸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다시 살릴 순 없을까. 요즘 뜨는 카페를 헌책방과 컬래버하면 어떨까. 국내에 이런 곳이 더러 있다고 한다. 더 많이 생기면 좋겠다. 물론 주(主)는 헌책방, 부(副)는 카페여야 한다. '클래식'의 가치를 지켜야 하니까. 지자체가 관심을 갖고 나서야 할 일이다.

요즘 출퇴근길 아파트 주차장에서 눈 호강을 한다. 한 진귀한 자동차를 마주해서다. '포니2'다. 1982년 출시됐으니 40년이 넘었다. 추억의 '대구 1'로 시작하는 번호판이 정겹다. 명실상부한 대한민국표(標) '클래식 카'다. 첫 국산차인 포니가 내년이면 탄생 50주년이다. 이를 앞두고 현대자동차가 최근 '포니 쿠페' 복원 모델을 선보였다. 이 차는 49년 전 포니와 함께 공개됐다가 꽃도 못 피운 비운의 차다. "과거를 정리하면서 다시 미래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에 복원하게 됐다." 현대차 회장의 말이다. 단순히 오래된 차가 아닌 미래세대에 전하는 유산으로 삼자는 뜻이다. '클래식'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옛날 노래가 좋아진다. 가사도, 멜로디도 '기승전결'이 있어서다. 시종 속삭이는 듯한 요즘 노래는 당최 와닿지 않는다. 집에서 유튜브를 통해 옛 대중가요를 자주 듣는다. 아내가 잔소리를 한다. "제발 옛날 노래 좀 듣지 마. 과거에 집착하는 것 같아. 갱년기 우울증 신호일 수도 있어." 영 틀린 말이 아니다. 고(古)·금(今)을 잘 구분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임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래도 옛것을 지켜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지 않겠나. 누가 뭐라 해도 난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오래된 것이 좋아)'다. 가슴 후벼 파는 옛 가요가 내겐 '클래식'이다.

이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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