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따라 이야기 따라 영양에 취하다 .9] 종교의 성지

  • 류혜숙 작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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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19 07:42  |  수정 2023-10-19 07:42  |  발행일 2023-10-19 제14면
최시형 은거지·머루산 천주교 성지…치열했던 민초들 숨결 오롯이
20230819 영양 머루산 교우촌1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에 위치한 천주교 머루산 성지. 신유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어와 교우촌을 이뤘다.
돌아보면 산이고 구비 돌면 천이다. 육지 속의 섬이고 오지 중의 오지다. 영양의 옛 이름은 고은(古隱)이라, 오죽하면 '숨겨진 곳' 혹은 '숨어있기 좋은 곳'이라 했겠나. 이 고은의 땅으로 산을 넘고 천을 거슬러 불교가 들어왔고 유교와 서학과 동학이 들어왔다. 산마루에서 고갯길에서 서낭당을 만난다. 물가에서 마을 한가운데서 오래된 탑을 본다. 심산 골짜기에서 동학의 치열했던 편린을 발견하고, 별과 가까운 신밀한 함지땅에서 서학의 처절한 고요를 마주한다. 뜨거운 역사적, 정치적, 사상적 힘이 영양 땅 곳곳에 은일이 자리하고 있다.

현리 모전오층석탑 있는 남악사 터
사회사업가 권영성이 영성사 세워

동학교주 최시형 일월산 죽현 은거
영해동학혁명 참가후 터전 쑥대밭

석보 머루산 천주교 복자 3명 배출
을해박해때 교우촌 신자 13명 순교


◆마음으로 세운 전통사찰, 현리 영성사

영양에는 탑이 많다. 대개가 신라 또는 고려시대의 것이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전탑계 모전석탑은 전국에 5개 밖에 없는데 그중 2개가 영양에 있다. 영양에 언제 불교가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홀로 남은 탑들과 여러 폐찰의 기록으로 보아 한때는 불교가 융성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과거 영양의 중심은 현리였다. 영양현의 관아가 있었고 수천 호의 가옥들이 즐비한 지역의 중심이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동악사, 서악사, 남악사, 북악사 네 개의 큰 사찰이 자리한 지역 불교의 중심이기도 했다.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 영해도호부에 왜구가 침입해 영양현과 청기현을 거쳐 내륙으로 향했는데, 그때 영양현 관아를 비롯해 현리의 네 사찰이 소실되고 만다. 1773년 편찬된 '영양현읍지'에 '동악, 서악, 남악, 북악의 4곳 사찰은 모두 현리의 옛터에 있는데, 지금도 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서악사 터에는 현재 1958년경 창건된 무량사가 위치하고 있다. 북악사 터에는 보물인 삼층석탑과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그리고 우뚝 솟아 있는 석탑은 보물 제2천69호인 영양 현리 모전오층석탑이다. 석탑이 자리한 곳은 북악의 남쪽, 남악사 터다. 현재 남악사 옛터에는 1940년에 창건된 영성사(永成寺)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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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가 권영성이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영성사는 가운데 석탑을 두고 대웅전과 산령각, 적묵당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남악'은 현리의 '남쪽에 있는 산'을 가리킨다. 현리 남쪽의 큰 산은 취소산이다. 취소산의 북쪽 지맥이 내려와 작게 솟은 봉우리는 화산이다. 화산이 반변천을 만나 절벽으로 이룬 언덕에 영성사가 올라앉아 있다. 영성사를 지은 이는 일제강점기 때 사회사업가인 권영성(權永成)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법당 현판을 자암(慈庵)이라 편액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영성사라 했다 한다. 1881년에 영양읍 서부리에서 태어난 권영성은 집안은 어려웠지만 일찍부터 사업을 시작해 지역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됐다. 그는 재산을 축적한 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 사업을 벌였고 특히 영양향교, 김천중학교, 대구의학전문학교, 영양초·중·고등학교, 화천초등학교, 대구농림학교 등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의 장례는 영양군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그를 기리는 송덕비는 영양군 내 거의 각 면마다 세워져 있다. 지금도 그에 대한 영양 사람들의 마음은 각별하다.

영성사는 가운데 석탑을 두고 세 칸 대웅전과 한 칸 산령각, 요사채로 쓰이는 적묵당이 넉넉히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매우 소박하여 언뜻 민가의 느낌도 난다. 창건 당시에는 적묵당이 법당이었으나 195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해 대웅전이라 편액 했다. 이후 1974년에 현재의 대웅전을 건립해 지금에 이른다. 영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이며,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중요한 우리의 유산으로 지정한 전통사찰이다. 영성사에는 삶의 철학이 된 유교와 대승불교로 꽃핀 불교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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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루산 성지로 가는 길에 남아있는 반보기 터.
◆동학 교주 최시형의 은거지, 일월면 용화리 죽현

19세기 후반은 절망과 핍박의 시대였다. 1860년 수운 최제우가 인내천과 제세안민을 외치며 동학을 세웠을 때 조선 백성의 반응은 뜨거웠다. '거의 날마다 동학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 날이 없고, 주막 아낙네와 산골 초동까지 주문을 외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1863년 선전관 정운구가 최제우를 체포하러 가는 길에 4백여 리 10여 개 군현을 지나면서 백성의 모습을 목격하고 기록한 자료다. 동학의 세가 급격히 확대되자 조정은 동학을 민심을 현혹하는 사악한 학문이라 규정하고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수운은 1863년 11월 체포되었고, 이듬해 3월 '바르지 못한 도로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대구 관덕정에서 처형되었다. 이때 동학의 기본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초고본도 불태워졌다.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동학의 제2교주 해월 최시형이 관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거처가 일월면 용화리 일월산의 죽현이다. 죽현은 영양과 봉화를 잇는 고갯길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고갯길은 조선중기 이후 장시의 발달과 더불어 개설되기 시작했지만 인가는 드물고 인적도 뜸했다고 한다. 최시형은 1865년경부터 1871년까지 일월산 죽현에 머물렀다고 전해지며 당시 많은 교도들이 몰려들어 동학촌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그는 급격히 확장된 경북 북부지역 교세를 관리하고 소실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집필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다 1871년 최초의 동학혁명인 영해동학혁명에 가담하게 되면서 일월산 동학촌은 쑥대밭이 된다.

혁명군은 3월10일 영해부 관아를 습격했다. 이후 최시형이 이끈 제1진과 본진은 퇴각하여 3월15일 일월산에서 천제를 지냈다. 다음날 일월산으로 관군이 들이닥쳤고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일월산 서북쪽 기슭 울연전으로 탈출했다. 혁명에 참가한 이들을 붙잡기 위해 관군이 대대적으로 잡아들인 이들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해 셀 수 없이 많다. 영해동학혁명에 몸 바친 이는 기록에 남겨진 이름만 114명, 마지막 일월산 교전으로 사망한 이들 중 13명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2021년 최시형의 은거지로 추정되는 터가 일월산 용화리에서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월산 정상 부근인 해발 1천m 지점에 자리한 은거지 터는 숨어 지내기에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갖춰 200여 명 이상이 집단으로 생활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식수원인 우물과 샘물도 여러 군데서 발견됐고 수령 150년가량의 살구나무도 그때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해혁명 이후 이어진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한다. 모두가 하느님이라는 것, 우리 모두는 존엄하다는 것. 시천주, 이 한마디가 민족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시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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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사 한쪽에 세워져 있는 비석들.
◆천주교 성지, 석보면 포산리 머루산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는 포도산 구릉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깊은 산골짜기에 형성된 개척마을로 예로부터 산머루가 많아 머루산, 구머리 또는 포산(葡山)이라 했다. 구머리는 머루를 일컫는 방언이고 포산은 머루산의 한자표기다. 포산 마을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구불구불 좁은 길을 가파르게 오르는 길밖에 없다. 마주 오는 차라도 만나면 망연해지고 마는 외길을 3㎞ 이상 올라가야 비로소 마을에 닿는다. 심산유곡 포산리는 함지박 같은 분지 땅에 쏙 들어 앉아 있다. 임진왜란 때는 인근 주민들의 피란처였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홍주, 예산 등 충청도 일대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었다. 15년 뒤인 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났다. 포졸들이 머루산 교우촌을 덮쳤고 33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안동감영으로 이송됐다. 이때 20명은 풀려났으나 나머지 13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대구감영에서 순교했다. 교우촌이 사라진 머루산에는 이후 동학교도가 성행했다. 구한말에는 신돌석 의병대장이 이곳을 드나들었으며 독립운동가 이상동 선생이 교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2014년 8월16일, 머루산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순교한 김시우 알렉시오, 이시임 안나, 김강이 시몬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머루산은 천주교 복자 3명을 배출한 성지다. 영양군에서는 천주교 안동교구와 협력해 머루산성지를 정비하고 역사의 현장으로 보전하고 있다. 성지는 아담하고 고요하다. 성모상과 십자가 고상을 가운데 두고 나무십자가의 길 14처가 에워싸고 있고, 맞은편에는 미사와 휴식을 할 수 있는 쉼터가 있다. 주변으로는 3백 그루의 머루나무를 심었다. 시간이 흐르면 머루나무는 자라 검붉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머루의 속(屬)명은 바이티스(Vitis)다. 이는 생명을 뜻한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영양군지, 대구경북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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