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어느 생의 가장 먼 길

  • 이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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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21 07:46  |  수정 2024-02-21 07:46  |  발행일 2024-02-21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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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란 (소설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서문시장에서 무거운 짐을 이고 교동시장까지 걸어가던 한 여인이 있었다. 짐이 많은 날은 어린 여식을 동행하여 잔짐을 들게 하기도 했다. 여인의 여식들은 번갈아 그 일에 동원되었다. 미로처럼 복잡한 시장통을 익숙하게 누비고 다니며 갖가지 물건을 떼는 엄마 곁에 서서 아이는 어쩐지 자꾸 부끄러웠다. 셈을 치를 때마다 바지춤을 끄르고 속바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엄마 때문이었을까. 물건값을 후려치는 그 억척스러운 태도 때문이었을까. 부끄럽기만 한 건 아니었다. 무거운 짐을 한 군데 몰아 부려두고 다른 점포로 종종걸음을 치는 엄마를 바라보며 짐을 지키던 아이는 엄마가 싱싱한 물고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느러미를 요령 있게 흔들며 사람과 짐으로 어수선한 통로를 미끈하게 빠져나가던 그 모습은 영락없이 그랬으니까. 그러나 생각 밑바닥에 깔린 마음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기실 그 여인은 짐을 이고 먼 길을 가는 데에는 남다른 이력이 있었다. 동무들이 책보를 들고 학교로 갈 무렵부터 떡함지를 이고 장사를 다닌 사람이었다. 학교는 어영부영 그만두게 되었다. 전쟁으로 피폐했던 시절에 떡을 팔려면 군부대로 가야 한다는 요령을 일찍 터득했고 훈련현장까지 먼지 나는 길을 걸어가 '완판'을 달성하기도 했다.

한평생 꽃놀이나 단풍놀이는 남의 일로 여겼고 1년 365일 가게 문을 닫는 날이 없었다. 장한 일생이라고, 이웃들은 탄복했다. 여인이 평생 걸은 길은 집과 교동시장의 가게와 '큰시장'이라고 불리던 서문시장을 잇는 길이었다. 아주 가끔 다른 길을 걸을 일이 생겼다. 잔짐을 들고 따르던 여식이 타지의 대학에 들어갔을 때 여인은 커다란 가방을 머리에 이고 대학 정문에서 후문까지 길게 뻗은 길을 걸었다. 짐은 무거웠고, 여인의 행색은 세련되지 못했다. 그날 여인은 여식이 머물게 된 기숙사로 가는 길이었다. 하필 졸업식 날이라 정성껏 차려입은 가족들이 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쓴 자식들과 사진을 찍느라 교정은 들뜨고 분주했다. 여인은 뿌듯했고 여식은 초라한 자신들이 창피했다. 여식에게는 하염없이 길게 느껴진 그 길이 여인에게는 아마 하나도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는 어느새 아득한 옛날이 되었다. 여인은 한껏 늙었고 베란다와 싱크대 사이가 온전히 자신의 다리로 오갈 수 있는 가장 먼 길이 되었다. 여식은 여인의 팔을 잡아주거나 뒤를 따라다니며 구령을 붙여준다. 하나둘 하나둘 우리 엄마 잘 걷네, 잘하네, 한 바퀴만 더. 그때 물고기처럼 싱싱했던 엄마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뭔지 이제는 잘 아는 중년이 되어.

이경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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