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 전망대의 일몰. |
능가사로 가는 길은 고즈넉했다. 몸집이 큰 겨울 나목 몇 그루가 휑뎅그렁하게 서 있었다. 천왕문을 지나자 경내는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명산 팔영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능가사는, 다른 세계처럼 꿈꾸는 풍경이었다. 그 겨울의 절집 능가사는, 무언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신(神)의 서식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대루를 통과하고 작은 연못에서 멈춘다. 마치 불사리(佛舍利)처럼, 가운데 섬이 있고, 거기에 즉심시불(卽心是佛)이 석 비에 새겨져 있다.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간결하고 명쾌한 문구인가. 마음은 나의 내면의 문제이다. 내 안의 마음에, 부처가 있다는 의미다. 내가 저 문구를 보지 못했다면, 나는 내 마음에 부처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안 어디에 부처가 있는 걸까. 그걸 찾는 건, 고르디우스의 복잡한 매듭처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그러나 그것보다 차라리 이 세상 사람 모두가 그리스도이고, 그들이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하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오늘이 교회 가는 주일이므로. 아무튼 내 안에 부처가 있다는 가설은 나의 인식에 새로운 발광체가 되었다.
바로 그 뒤에 종각이 있다. 능가사 범종은 현존하는 김애립(金愛立) 작품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인 1698년에 제작된 것으로, 김애립 범종의 원숙한 기량이 유감없이 녹아있는 17세기를 대표하는 수작이다. 이 범종은 맑은소리, 긴 여운, 뚜렷한 맥놀이가 있고, 낮은음의 더딘 울림과 사뭇 자비로운 중심음이 멀리 길게 이어지며, 아득한 허공으로 선을 그으면서 퍼져나가, 사바세계로 스며드는 신비감이 있다고. 한다.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대웅전으로 간다. 대웅전은 60평 면적이다. 그런데 중간에 기둥이 없다는 점이 놀랍다. 어떤 건축 공법이었을까. 대웅전이 품고 있는 그 많은 뜻을 다 말할 수는 없고, 기둥의 주련만 한번 해석해 보기로 한다.
김애립 대표 수작 '능가사 범종'
뚜렷한 맥놀이현상에 긴 여운
중산 일몰 전망대 풍경 장관
드넓은 갯벌 위 철새들 비행
'겹겹이 늘어선 누각이 화장의 세계요(樓閣重重華藏界). 보랏빛 비단 장막 뒤에는 진주를 뿌린 듯하네(紫羅帳裏撒眞珠). 사오백 그루가 늘어진 버드나무 숲(四五百株花柳巷). 이삼천 척의 범음이 울리는 누각(二三千尺管絃樓). 물소는 달을 감상하며 아롱진 달무늬 뿔에 새기고(犀因玩月紋生角). 코끼리는 우레에 놀라 번개무늬를 상아에 입히네(象被驚雷化入牙)' 정말 아찔하며 훅 가게 하는 선(禪) 시(詩)다. 이렇게 아름다운 주련의 시가 대웅전을 마음의 귀향지로 만들고 있다.
절 뒤편에 있는 사적비를 찾아간다. 사적비는 1726년(영조 2년)에 세웠다. 불교 유래와 절의 사적을 기록해 놓은 중요한 자료이다. 이 비석은 처음 탑 앞에 있었는데, 덕목이 도력으로 지금 장소로 옮겼다는 전설이 있다. 사적비에 의하면, 기원후 417년(신라 눌지왕 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여 보현사라 하였다고 하나,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탄 후, 1644년(인조 22년)에 벽천 정현 대사가 다시 짓고 능가사로 사명을 바꾸었다. 당시 벽천은 나이 90세 노승으로, 지리산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절을 지어 중생을 제도하라는 현몽을 받고, 이곳에 능가사를 다시 지었다고 한다. 또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능가사는 팔령산(현, 팔영산) 아래에 있다.
아득한 옛날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 태자가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이곳에 이르렀다. 태자는 이 절 관음보살에게 엎드려 밤낮을 기도하며, 고국에 돌아가기를 빌었다. 기도 7일 만에 어떤 승려가 나타나 태자를 끼고 파도를 넘어갔다고 하며, 절의 법당에 그 내용을 그려 놓았던 벽화가 조선 영조 때까지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건 물론 전설일 수 있다.
현대는 의식의 비대화와 과학이라는 양 수레바퀴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이끌어 줄 신화(神話)를 엉뚱하게 미신으로 비과학으로 몰아붙이는 영혼 상실, 방향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설과 신화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의미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쾌락과 자유만을 추구하는 사르트르적인 세계에 내던져진 채, 생명의 에너지를 물질의 추구에만 소모하는 게 아닐까.
돌아 나온다. 공터였던 응진전 앞마당에 의상조사가 화엄경을 210자 7언 30구로 요약한 법성게를 담은 '화엄 일승법계도'를 본떠서 만든 차밭 길이 있다. 이제 수행과 신행의 공간으로 탈바꿈된 이 길을 따라 걷는 '요잡'은 자기 마음에 숨어있는 부처를 찾는 의식이다. 고개를 들어 팔영산을 바라본다. 겨울의 오후 햇살과 산의 나무들이 부르르 몸을 떠는 어스름 위로 여덟 개의 암 봉이 너무 수려해 눈시울을 비비고 다시 봐야 했다.
고흥의 명산 팔영산. |
능가사 대웅전과 팔영산. |
범종각과 즉심시불 석비. |
팔영산에도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옛적, 중국의 위(魏, 한나라의 뒤를 이어 조비가 220년에 세운 나라) 왕이 어느 날 아침 세수 물을 받았더니 그 대야에 8개의 빼어난 산봉우리가 비쳤다. 기이하게 여겨 신하를 보내 찾게 했는데, 그 산이 팔영산이었다. 그때까지 팔전산이라 부르던 것을, 세수 물에 비친 그림자 영자를 써서 팔영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에서 좌로 여덟 봉우리가 빼어난 자태로 공제 선을 만드는데, 신비하기만 하다. 산이 신령하다 하여, 한때 신흥종교가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또 팔영산에는 조선 시대 봉수대가 있고, 일제강점기에는 의병 활동의 근거지로, 광복 후에는 빨치산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한다.
주위를 살펴보는데, '이제염오 진흙탕 속에서도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간판을 단 능가사 한옥 카페가 보인다. 들어가서 고흥 특산물인 유자차를 주문해서 마신다. 창밖으로 벙글은 야산과 절 풍경이 내 정수리까지 흘러와 번뇌를 씻어준다. 실내는 한적한 분위기에 경쾌하고 은은한 음악으로 가득 차 정말 행복했다. 이제 곧 중산 일몰 전망대로 출발해야 했다. 오늘은 년 중 해가 짧은 겨울날이었으므로.
중산 일몰 전망대는 의외로 여행객이 많았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가리기도 했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황혼의 겨울 하늘은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썰물이 나간 겨울 바다에는 여럿 섬과 회청색 갯벌이 흐릿한 이내처럼 아슴아슴하게 보였다. 해는 기울수록 더 붉게 탔다. 그럴수록 길고 긴 갯벌과 먼바다는 차츰 눈이 시린 검푸른 색으로 변해갔다. 구름이 짙었으나 노을빛이 퍼지는 전망이 좋았으므로 우리는 숨죽여 더욱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찬 허공을 가로지르며, 그 노을의 하늘 위로 철새가 날아간다. 그건 비현실 같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러시아의 노래 백학을 들려주었다. 우리 민족 한의 정서와 비슷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곡이었다. 그 리듬과 가사는 떨고 있는 우리의 몸을 슬픔으로 얼어붙게 하였다.
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
'…그 대신 하얀 학이 되었나. 그들은 옛날부터 하늘을 날면서 우리를 부른 듯하여, 그 때문에 우리가 자주 슬픔에 잠긴 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지. 날아가네, 날아가네, 저 하늘의 지친 학의 무리들. 날아가네, 저무는 하루의 안개 속을. 무리 지은 대오의 조금만 틈새, 그 자리가 혹 내 자리가 아닐지. 그날이 오면, 학들과 함께 나는 회청색의 어스름 속을 끝없이 날아가리. 대지에 남겨둔 그대들의 이름자를. 천상 아래 새처럼 목놓아 부르면서.'
이 중산 전망대가 어쩜 그렇게 백학의 노랫말 얼개를 부둥켜 안아버리는지. 우리는 어둠이 내렸음에도 음악이 다할 때까지, 검푸른 바다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떠날 줄 몰랐다.
글=김찬일 시인 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유판도 여행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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