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재기발랄 고딩 예술가들(2) 사람 없는 시간에 게릴라식 작업…새 작품 나타나면 학생들 몰려 비평

  •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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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8-23  |  수정 2024-08-23 15:27  |  발행일 2024-08-23 제12면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재기발랄 고딩 예술가들(2) 사람 없는 시간에 게릴라식 작업…새 작품 나타나면 학생들 몰려 비평
대구제일고 미술중점반 학생들이 '소멸과 창조'를 주제로 복도 벽면에 그린 그림. <대구시교육청 제공>
지난 16일 방문한 대구제일고의 3층 복도는 예술의 장이었다. 계단을 올라 3층 입구에 들어서니 벽에 그려진 각양각색의 그림이 기자를 반기고 있었다. 스파이더맨〈원 안〉, 학사 일정, 물고기를 담은 정물화 등 그림의 종류와 화풍도 다양했다. 이는 대구제일고 미술중점반 학생들의 작품이다. 학생들은 지난 5월부터 학교의 3층 전체를 장소로 삼아 '복도 게릴라 창작전'을 열고 복도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전시 주제는 '소멸과 창조'다. 현재 제일고는 약 50년 된 건물을 쓰고 있다. 오래된 탓에 건물은 내년이면 철거된다. 학교 구성원들은 새로 지어진 신축 건물로 이동해 생활할 예정이다. 이 가운데 42명의 미술중점반 학생이 사라질 건물을 전시 공간으로 변형해 기존 건물에서의 추억을 그림을 통해 남기기로 했다. 주제부터 진행까지 지도교사의 큰 개입 없이 학생들이 주도로 기획해 진행 중이다. 작품도 '소멸과 창조'라는 주제 내에서 자유롭게 만든다. 개인 혼자 그린 것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그룹을 만들어 준비한 그림도 있다.

'소멸과 창조' 테마 자유형식
개인·그룹별 각양각색 그림
작품에 담긴 의미 공개 안해
토론의 장 열려 다양한 해석
새로운 예술시각·가치 발견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재기발랄 고딩 예술가들(2) 사람 없는 시간에 게릴라식 작업…새 작품 나타나면 학생들 몰려 비평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재기발랄 고딩 예술가들(2) 사람 없는 시간에 게릴라식 작업…새 작품 나타나면 학생들 몰려 비평
대구제일고 미술중점반 학생들의 '복도 게릴라 창작전' 작품.
박지수 미술중점반 지도교사는 "외부인이 봤을 땐 일반적인 벽화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시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 소멸하는 공간에서 예술을 창조하는 게 목적"이라며 "현재 사용 중인 건물이 올해까지만 존재하고 내년엔 사라지기 때문에 오로지 올해만 열 수 있는 전시다. 특별한 뜻이 담겨 있는 만큼 학생들도 즐거워하며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익명성'이다. 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인 '뱅크시(Banksy)'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얼굴 없는 거리 예술가'로 알려진 뱅크시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활동한다. 이 전시도 그렇다. 익명성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보다 창의성을 발휘하고 자유롭게 작업하기 위해서다. 작업도 역시 익명성을 철저히 지킬 수 있는 시간에 진행된다.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인 이른 아침이나 하교한 늦은 저녁, 재량휴업일이나 공휴일 중 건물 출입이 가능할 때 등이 된다. 그래서 누가 그렸는지, 그림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공개되지 않는다. 전시에 참여하는 학생들마저도 서로 누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모른다. 오로지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한 그룹의 작품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재기발랄 고딩 예술가들(2) 사람 없는 시간에 게릴라식 작업…새 작품 나타나면 학생들 몰려 비평
학교건물 복도 벽 그림. <대구시교육청 제공>
학생들의 활동은 그림을 그리고 전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복도에 새로운 작품이 생겨날 때마다 토론이 열린다. 토론장은 수업 시간이 되기도 하고, 미술중점반 단체 채팅방이 될 때도 있다. 지도교사가 새 작품을 소개하거나 사진을 찍어 채팅방에 올리면 학생들은 작품의 의미에 대해 추론하고 비평한다. 다른 학생들의 해석을 통해 '소멸과 창조'라는 큰 틀 내에서 새로운 시각과 가치를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학교 내에서 열리는 전시라 관람은 학내 구성원으로 한정된다. 하지만 반응은 뜨겁고 긍정적이다. 박지수 지도교사는 "평소 다른 과목 선생님들은 미술중점반 학생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자주 못 본다. 그런데 요즘은 야근 중 학생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접하는 분들이 있는데, '역시 예술하는 애들이네' 하며 달리 보시는 듯하다"라며 미소지었다. 전시가 진행되는 3층은 도서관이 있어 일반반 학생들도 자주 오가는 층이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의 주목도도 높다. 자신들도 참여하고 싶다며 이야기하기도 하고, 미술 수업 시간에도 전시 작품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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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게릴라 창작전'이 진행 중인 대구제일고 3층 복도.
전시에 참여한 미술중점반 3학년 김민정 학생은 "수업 시간에 뱅크시라는 작가에 대해 학습하고 난 뒤 그 작가에 대해 더 탐구를 해봤다. 익명으로 길가에 그림을 그리고 도망가는 콘셉트를 갖고 있는데, 그런 콘셉트를 유지함으로써 오히려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뱅크시의 콘셉트를 이런 프로그램에 녹여내 친구들이 없을 때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작업하게 됐다"며 "흔히 지나칠 수 있는 복도에 그림을 그리면서 장소나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도 충분히 예술을 펼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글·사진=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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