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진 대구대 총장 |
가을이 오는 듯 퍼뜩 저물어 간다. 도회지 길거리와 대형 백화점에는 성급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올해도 이렇게 세밑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맘때면 문득 새해 정초에 굳은 각오로 다짐했던 여러 일을 돌이켜 보게 된다. 누구라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저마다의 소회가 있을 것이다. 어느 장면에서는 크고 작은 성취도 떠오르고 나름대로 보람 있는 일도 있을 것이다. 다른 어떤 순간에는 아쉬운 후회와 미처 최선을 다하지 못한 일에 대한 자책도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갑진년을 한번 되돌아볼 때이다.
한껏 얇아진 달력을 마주하며 올해 있은 여러 개인사를 회고하다 문득 사회 전반에 생각이 멈춘다. 갑진년은 청룡의 해라고 했다. 푸른 용의 기운으로 승승장구를 기대하며 새해를 시작했는데 과연 기대한 만큼 우리의 국운이 상승하고 국민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는가 자문해본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얼마나 발전하였는가,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개선되고 생활은 더 풍요로워졌는가, 국민에게 더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가 되었는가 등 여러 질문을 해본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이런 질문에 선뜻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현실을 깨닫는다. 올해는 내내 시끄럽고 혼란했다.
좋은 일도 많았다. 여러 좋았던 일 중에는 올림픽에서의 빛나는 장면도 있었고 가을에 날아온 노벨문학상 소식도 크게 축하할 쾌거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올해는 좋았던 일보다 걱정할 일이 많았다. 얼핏 생각해도 정치적 적대는 심해지고 사회적 균열은 커졌다. 경제는 더 어려워지고 불평등은 확대되며 부정적으로 구조화되었다. 사회의 다양성은 축소되고 약자가 설자리는 점차 밀려나고 없어졌다. 정부는 소리높여 지방시대를 주창했으나 지방마다 지역소멸을 더욱 걱정하고 있으니 크나큰 아이러니다.
공적 영역에서 꼴사나운 일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크고 작은 자리를 두고 너나없이 자천하여 손들거나 알음알음으로 밀어주고 끼리끼리 끌어주는 일이 노골화하고 다반사가 되었다. 서로 편을 갈라 다른 편은 앞뒤 없이 비방하고 공격하는 일도 유난히 잦았다.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 간에 국가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도 격렬했고 사회적 이슈를 두고도 심각하게 충돌하곤 했다. 정치인과 관료 집단이 서로 반목하며 극단으로 치닫고 국민을 편안하게 해야 할 정치와 행정이 오히려 국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일반 개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까발리고 끝장을 보는 일도 유난히 많았다. 국회 청문회에서 보았듯이 공적인 영역에 등장한 사람들은 직접 당사자는 물론이고 일가친척까지 탈탈 털리는 일이 당연한 듯이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능력 있고 인정받는 인재들이 사나운 세상을 피해 나서기를 주저하게 되고 심지어 세상사에 관심을 끊고 세상으로부터 돌아앉는 일도 있었다. 용기를 내어 세상을 향해 목소리라도 낼라치면 주변에서 나서 적극적으로 말리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래저래 무서운 세상이다.
선량한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등 돌리거나 무관심하게 되는 사회는 더 이상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능력 있고 겸손한 사람은 뒷전으로 밀리고 남보다 포장에 능하고 먼저 손드는 사람이 크고 작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라고 할 수는 없다. 지난 수년 동안 크리스마스 분위기나 연말연시의 거리 풍경이 예전만 못한 것이 단순히 경제가 어려워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 존중하고 관용하며 공존하는 그런 사회가 새삼 그리워진다.박순진 대구대 총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