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은의 천일영화] 215분을 견디면 보이는 것들, '브루탈리스트'

  •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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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2-14  |  수정 2025-02-14 07:03  |  발행일 2025-02-14 제26면
거대 자본가의 차별과 멸시

美이민자 삶 세밀히 그려내

신식 건축물과의 대비 '백미'

2차 세계대전 직후 시대상

트럼프 2기 미국과 겹쳐져

[윤성은의 천일영화] 215분을 견디면 보이는 것들, 브루탈리스트
윤성은 영화평론가

긴 영화들이 오고 있다. 공인된 숏폼의 시대에 대체 무슨 일일까. '아바타'처럼 도파민 넘치는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대중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들이기에 더 의아스럽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후보작들 얘기다. 먼저, 작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아노라'(감독 션 베이커)의 러닝타임은 139분이고, 대담한 소재와 데미 무어의 명연기로 화제가 된 '서브스턴스'(감독 코랄리 파르자)는 141분짜리 영화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3개 부문, 5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총 8개 부문의 후보에 오른 '컴플리트 언노운'(감독 제임스 맨골드)은 밥 딜런으로 분한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가 인상적인 음악영화로, 러닝타임은 141분이다. 독창적인 뮤지컬 블랙코미디, '에밀리아 페레즈'(감독 자크 오디아르)는 총 13개 부문의 후보에 올라 있는데, 132분짜리 영화로 역시 2시간이 넘어간다.

그러나 압권은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 수상작이자 오스카상 10개 부문의 후보에 오른 '브루탈리스트'(감독 브래디 코베)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건축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무려 215분 동안 상영된다. 중간에 아예 15분의 쉬는 시간(인터미션)이 포함되어 있지만, 요즘 관객들에게는 큰 결심과 각오가 필요한 러닝타임이다. 천만다행히도, 유력한 작품상 후보로 일컬어질 만큼 영화가 무척 훌륭하다. 특히 70㎜ 필름의 고혹하고 웅장한 영상을 제대로 느끼려면 극장에서 보라고 권할 수밖에 없다.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인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천신만고 끝에 미국땅을 밟는다. 처음에는 필라델피아에 먼저 정착해 가구점을 운영하던 사촌 '아틸라'(알렉산드로 니볼라)가 일자리와 잠자리를 제공하며 그를 돕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아틸라는 라즐로가 사업에 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그를 쫓아내 버리고 라즐로는 막노동을 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라즐로가 헝가리에서 유명한 건축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재벌 '해리스'(가이 피어스)가 찾아와 그를 집으로 초대하고, 자신이 계획 중인 지역 문화센터의 건축을 맡긴다. 다시 한순간에 신분이 격상된 라즐로는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숙식하며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리고, 자신의 재능을 펼쳐나간다. 유럽에 발이 묶였던 아내와 조카까지 데려오는 데 성공하자 그에게는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변덕이 심한 해리스로 인해 라즐로의 인생은 거센 파도를 타게 된다.

'브루탈리스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도 자본가들 밑에서 멸시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민자의 삶을 날카로운 시선과 세련된 미장센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새로운 건축물과 이민자를 정교하게 엮어낸 부분이 백미다. 라즐로는 고국에서 겪었던 아픔을 건축이라는 예술로 승화시키려 고군분투한다. 라즐로가 고수하는 '브루탈리즘'은 군수물자 자재였던 콘크리트와 철강을 사용하고, 장식보다 기능에 초점을 둔 건축양식이다. 그러나 이 현대적 건축물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주변 사람들의 견제와 불신, 지원의 불확실성 속에서 라즐로의 삶과 영혼은 점점 피폐해져 간다. 이 영화가 잘 반영하고 있는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시대상은 사실 2기 트럼프 시대를 맞은 동시대 미국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에 더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라즐로의 굴곡진 세월을 보여주는데 215분은 합리적인 시간이라고.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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