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순의 문명산책] 그러니 이제,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다오!

  •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 |
  • 입력 2025-05-02  |  발행일 2025-05-02 제26면
[김중순의 문명산책] 그러니 이제,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다오!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은 “Call me Ishmael!"이라는 강력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던지는 하나의 존재 선언이며, 이 세상에서 밀려난 자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호출하는 장엄한 행위이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고래잡이 배를 타고 망망한 바다를 향해 떠난다.

성서의 이스마엘은 여종 하갈의 몸에서 태어난 아브라함의 첫아들이다. 그러나 적자인 이삭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의 서자 신분은 인정받지 못했고 선택받지 못했다. 광야로 쫓겨나 문명의 중심에서 배제되었다. 오늘날 그 이름은 이슬람 문명의 상징이며,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다. 세속적 질서에서 밀려난 그는 결국 낯선 세계의 낯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고래잡이를 떠난 이스마엘의 항해는 회피가 아니라, 또 다른 문명과의 만남을 위한 여정이었다. 그는 피부색, 종교, 언어 모두가 다른 퀴퀘그를 만난다. 누구보다도 깊은 도덕성과 공동체적 책임감을 지녔고, 말없이 행동으로 신념을 실천하는 인물이다. 진정한 우정은 법이나 규범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과 마주침에서 시작됨을 말해주듯 그들은 이내 형제가 된다. 이스마엘은 문명인의 기준으로 보면 '야만인'이라고 할 퀴퀘그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자신을 다시 구성한다.

하지만 그가 탄 배는 지배와 정복의 환상에 사로잡힌 선장에게 이끌려 파멸을 향해 질주한다. 그의 분노는 오로지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어 버린 거대한 존재, 고래를 향한 것이고, 고래는 '악 그 자체'이다. 광기 어린 복수심으로 가득 찬 선장은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망상 속에서 '위대함'이라는 이름으로 고래를 잡으러 나선 것이다. 그리고 고래를 죽이고, 땅을 불태우며, 타자를 침묵시키는 언어를 도덕이라 말하고 있다.

고래잡이 배의 질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서구 문명은 '이스마엘'을 배제하면서 성장했고, 그 배제의 서사로 자신을 정당화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 문명은 스스로의 덫에 걸려 비틀거리고 있다. 욕망과 복수심으로 가득찬 또 다른 선장이 등장하여 오늘날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다른' 문명의 자리를 빼앗고 있다. 중심 문명이 타자를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침묵시키는 구조적 폭력의 상징이다. 타자의 이름은 지워지고, 그들의 언어는 악이 되며, 그들의 신은 왜곡된다.

그것은 거대한 역설이다.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들은 자이고, 하나님의 눈물이 광야에 떨어진 것을 기억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로 하여금 광야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하여 '선택'과 '구원'이 결코 독점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 탄생의 가능성을 암시해준다.

고래는 단지 동물이 아니었다. 자연의 심연이며, 침묵하는 신의 얼굴이며 타자인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심연을 향해 작살을 던진 선장은 고래와 함께 바다에 잠겨 파멸하고 말았다. 문명과 이성, 신의 이름으로 항해한 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야만인' 퀴퀘그가 남긴 관을 붙들고 표류하다가 구출되었다.

문명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만남과 흐름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퀴퀘그와의 우정, 타자와의 연대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새롭게 발견한 이스마엘은 '경계지대'에서 새로운 문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인다. “그러니 이제,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다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