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땅에는 명기(名基)가 많다. 고을터, 절터, 집터, 묘터를 망라하면
아마도 이 땅에서 가장 많은 명기를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 영남일 듯 싶다.
그 숱한 명기 중에서도 실로 묘한 풍수 이력(履歷)을 쌓아오고 있는 곳
이 있다.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竗谷 혹은 妙洞)이 바로 그곳이다.
만약 영남 땅에서 풍수 때문에 태어났고, 풍수로써 가꾸어져 왔으며, 풍수
가 여전히 살아숨쉬고 있는 마을을 들라면 필자는 단연 묘골을 꼽는다. 비
단 '낙동강가에 있으면서도 강이 보이지 않고, 들판을 끼고 있으면서도 들
판이 보이지 않는', 그런 묘한 지세 때문만은 아니다. 그 터는 알고보면
조기(肇基:터를 엶)에서부터 작금의 토지이용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풍수와
연(緣)을 끊어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풍수 명소 중의 명소다. 일개 보신
지(保身地)에서 한 가문의 세거지 명당으로, 또한 지금은 육신사(六臣祠)
가 있는 역사적인 명소와 전원주택지로 거듭 태어나고 있는 그 변화상을
보노라면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적인 대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이다.
묘골은 원래 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박팽년(호는 취금헌, 시호는 충정
공)의 손자 박일산(朴壹珊)이 피신지로 삼으면서 그 처녀판국을 선보였던
것으로 전해온다. 삼족을 멸하라는 세조의 추상같은 엄명이 내려져 있는
가운데, 대구에 관비로 내려와 있던 취금헌의 둘째 며느리(성주이씨)가 아
들(유복자)을 낳아, 그녀의 종이 낳은 딸과 서로 바꾸어 기르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보다 흥미로운 점은 성주고을 친정
가까운 곳에서도 숨어 살 만한 보신의 터로 어떻게 그토록 절묘한 묘골을
고를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터 자체가 지닌 천연적인 궁벽
성과 폐쇄성, 그리고 용산(龍山) 오른쪽 능선 너머로 도도히 흐르는 낙동
강 줄기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됐음직하다. 그 터의 본색을 아는 데는 사실
세간에 전해오는 회룡고미형(回龍顧尾形) 명당설보다는 파자형(巴字形) 지
세설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전자는 묘골의 진산(鎭山:마을을 수호해주는
산)으로 팔공산을 끌어들인다. 팔공산 연맥이 가산(架山)에서 소학산(巢鶴
山)으로 이어진 후, 거기에서 한 지맥이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장원봉(壯
元峰)-거무산(巨巫山 혹은 錦舞山)-용산(龍山)-구봉산(九峰山)으로 이어져
낙동강과 만나는데, 묘골이 들어앉은 용산 자락은 마치 팔공산을 머리로
하는 거대한 용이 자신의 꼬리를 돌아보는 듯한, 이른바 회룡고미형의 대
명당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묘골의 비좁은 판국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거창한 풍수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묘골 터에 대한 그같은 거시적이
면서도 내맥(來脈)적인 풍수설의 등장은 아마도 그 터를 세거지로 삼은 순
천(혹은 묘골)박씨 가문이 후일 크게 발흥한 것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음직
하다.
그에 비해 파자형 지세설은 보다 미시적이고 가시적이다. 묘골의 안산
너머에 파회(巴回)라는 마을이 있다. 묘골박씨 가문이 흥하면서 후일 세거
지가 확대돼 생겨난 마을인데, 모르는 사람은 마치 안동 하회(河回)마을처
럼 물줄기가 굽이 도는 마을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오해
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파회는 산줄기가 마치 파(巴)자 모양으로 감싸돌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글자의 음이 똑같은 파회(坡回)라는 곳이름
이나 돌골(回谷)마을 같은 이름이 같이 쓰고 있는 것만 봐도 그같은 사실
은 충분히 입증된다. 그러고 보면 파자를 실제 지세에 대응시킬 경우, 윗
부분 오른쪽 네모 안은 묘골이고, 왼쪽 네모 안은 파회인 셈이다. 아닌게
아니라 현장에서 묘골 일대의 지세를 동에서 서로 조망해 볼 것 같으면 영
락없이 그 글자 모양을 하고 있다. 그 경우 출입구는 오로지 한 군데, 동
남쪽으로 트인 부분뿐이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개방된 곳이 바
로 그 구석진 한 곳 뿐이라면 그런 터가 지닌 특성이란 것은 뻔하지 않겠
는가. 밖에서도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쉬 눈치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맘대로 밖을 내다볼 수 없다. 그 점이 곧 묘골 터의 본
색이자, 그곳이 처음에는 은거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인식됐던 주된 이유인
것이다.
어쨌거나 묘골은 열일곱살 된 박비(박씨 성을 가진 노비라는 뜻)가 성종
으로부터 일산(사육신 중 오직 하나 남은 혈육이라는 의미)이라는 이름과
사복시정(司僕侍正)의 벼슬을 받으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가 묘
골을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세거지로 삼기로 결심하고 1479년에 그곳에다
99칸의 종가 건물을 지은 까닭이다. 현재의 육신사 경내에 터잡고 있었다
는 흥(興)자형의 종가 건물은 임진왜란때 소실돼 버려 지금은 광해군 6년
에 중건된 태고정(太古亭 혹은 一是樓)만 보존돼 오지만, 골짝안에서도 그
건물이 입지해 있는 앉음새나 규모를 감안하면 종가의 위용이 어떠했는지
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선조 31년(1598)에 명나라 사신의 접반사(接伴使)
로 묘골을 찾았던 이호민(李好閔)은 그 당시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그
터의 됨됨이를 예찬하고 있다.
"박씨는 충현의 후예로 순(舜)임금 질그릇 굽던 하빈에 살고 있네/ 오늘
접반사로 오게 되어 이곳에 높은 문호(門戶) 찾았노라/ 물 굽이진 곳에 임
관(林館)이 펼쳐 있고/ 산줄기 싸고돌아 절모(節 : 임금이 使者에게 주는
旗)가 가려졌네/ 이제부터 천하의 선비들이 경치를 말할 적에 이 강 언덕
꼽으리라."
터의 위상이 변해도 어떻게 그토록 급작스레 변할 수 있다는 말이던가.
박일산이 그 옛날 자신을 지켜준 묘골에 애착을 가져 그곳을 세거지로 삼
았든 아니든, 그 당시부터 이미 묘골은 예전의 묘골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불변의 명당은 없다고 하지만 한낱 은거지에 불과했던 묘골의
위상을 그토록 드높인 박씨 가문의 노력이 그야말로 놀랍지 않은가.
1975년에 용산 기슭 종가가 있던 자리에 육신사가 들어선 것은 알고 보
면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다. 혹자는 독재정권이 이른바 '충효위인유적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그 사업을 진행한 것을 못마땅해 하지만, 본디 파회마을
하빈서원에 있었던 하빈사(사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던 곳)가
고종 3년(1866)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낙빈서원과 함께 훼철된
바 있는데다, 묘골의 그 터가 원래부터 사육신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혈육
과 인연을 맺은 곳임을 감안하면 그곳에 육신사가 세워진 것을 얼마든지
사필귀정으로 여길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더구나 그 자리는 묘골 안에서
도 가장 좋은 터다. 제 아무리 나지막한 용산 줄기가 골짜기를 둘러싸고
있다 할지라도 그 공간적인 폐쇄성과 다소 높이 솟은 조.안산(朝.案山)을
고려할 것 같으면 굳이 조안증혈(朝案證穴:주산의 혈처는 조.안산의 높이
에 비례함)의 원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누구나 묘골에서는 그 정도의 높
이라야 혈처(穴處)가 될 수 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게다가 오른쪽
능선 凹부에 세워진 6각정은 묘골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주고 있지 않는가.
육신사의 정체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그 형태를 6각정으로 만들었기 때문
에 그렇다는 게 아니다. 그곳은 원래부터 묘골의 취약한 허결처로 그 어떤
비보물(裨補物)을 설치해야 할 곳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왜 굳
이 그곳으로 올라가는 길을 시멘트로 포장하여 그 효과를 반감시켰느냐 하
는 것이다.
묘골의 명기성(明基性)을 떨어뜨린 것은 사실 그뿐이 아니다. 건물이 퇴
락하여 어쩔 수 없이 마을 초입의 저지대에 옮겨 세웠다는 충효당은 그렇
다치더라도 골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높은 산기슭 위에 동남향의 현대식
건물이 한두 채씩 늘어나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마도
골짝 저지대의 갑갑함을 피해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을 취하려다 보니 그
런 부조화스런 토지이용이 나타나는 것 같은데, 모름지기 묘골 터의 자연
지세가 좋아 그 터를 찾은 사람이라면 굳이 그 명기성을 훼손하면서까지
부적합한 곳에다 집을 마구 지을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불과 한달여 전에
좌청룡 산등성이 위의 엄청난 숲을 제거하고 구묘들을 새롭게 단장한 일은
그야말로 묘골 토지이용의 최대악으로 꼽을만한 일이다.
비록 그곳이 묘골박씨 가문의 뿌리되는 명기이고, 또 지금은 그 후손들
이 대부분 도시로 나가 살고 있어 어떤 식으로든 본향으로서의 묘골의 이
미지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나, 온화하고 명
미한 용산 줄기를 그렇게까지 훼손한 것은 쉬 납득이 가지 않는다. 만약
묘골을 사후의 본향 회귀 장소로 삼을 요량이면 동네 어귀 용산 자락 끝에
만들어져 있는 그곳 출신 유명 정치인 박모씨의 가족 납골묘가 그 좋은 본
보기가 될 성싶다.
용산 6각정을 내려오는데, 뭇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참으로 요란하다.
그러고 보면 묘골은 그 오랜 질곡의 역사를 감내해 오면서 비록 터의 용
도는 변해왔을지언정 생명력으로 가득찬 명기성만은 굳건히 지켜져온 게
틀림없다. 그런 생명력 때문인지 "요즘은 묘골의 아래쪽 평지보다는 산기
슭 위의 땅이 훨씬 더 비싸게 거래된다"는 한 촌부의 말이 그렇게 귀에 거
슬릴 수가 없다.
<풍수학자.지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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