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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가지 이상 다양한 반찬이 어우러진 칠성시장 내 한 보리밥집의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에 앉아 맛있게 식사중인 손님들. 현재 영천, 포항, 영동, 선산, 부광 등 10개 업소가 있다. |
멋진 문화상품이기도 한 전통시장이 제겐 '음식'으로 보입니다.
물론 눈과 가슴으로 그걸 먹어야겠죠. 고목처럼 앉아 난전을 지키고 있는 할매급 상인들. 산전수전 다 겪고 더는 무서울 것도 없는 저들의 잇속은 번개처럼 빠르고 악발이 같지만 잔정만은 남한테 지지 않죠. 그들이 읽어내는 '현실독법'은 탁월합니다. 종일 한 자리에 앉아 묵묵히 손님을 기다립니다. 꼭 보살 같습니다. 그 기세가 토굴정진하는 수도승 못지 않습니다. 꾸벅꾸벅 졸다가도 손님 인기척이 들리면 이내 그들의 눈빛은 맹수처럼 변합니다. 억척과 인내, 그게 그들에겐 '수호천사'이겠죠. 그 누구도 저들을 돈만 밝히는 자들로 폄훼할 수 없습니다. 정중함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막말톤의 대화, 눈엣가시 같은 경쟁 상인과 싸울 적엔 입에 거품을 뭅니다. 그게 서민경제를 지켜주는 지도 모르겠네요. 솔직히 요즘 대형마트나 백화점은 '증류수' 같습니다. 하지만 전통시장은 온갖 광물질과 병균도 혼재한 '샘물' 같습니다. 풋풋함은 후자가 더 진할 겁니다.
이번회부터 지역 전통시장에 숨어 있는 명물 먹거리를 수면 위로 올려볼 계획입니다.
먼저 칠성시장으로 갔습니다. 이 시장은 공룡처럼 큽니다. 식재료만 갖고 따지면 한강 이남 최고 규모입니다. 각종 식품 점포만 500개 이상입니다. 현재 칠성시장에는 10개 단체가 혼재돼 있습니다. 난무처럼 얽힌 영업권 관련 정보는 시·구청 행정력으로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낮보다 오전 2~6시에 와야 진면목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채소와 활어 및 어패류 번개시장이 압권입니다. 물건을 처분한 상인들이 아침을 먹기 위해 들르는 식당이 시장 내에 있습니다. 바로 신암교 서편 칠성시장 상가 내 할매 보리밥집입니다
칠성시장 명물 중에 보리밥 할매가 있다는 걸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현재 10군데가 산재해 있습니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뷔페식으로 발전했고 모든 집에서 보리밥 숭늉을 냅니다. 3인방 할매가 있습니다. 냉면집의 이정기(72), 포항집의 손경연(70), 영천집의 정용자씨(62)입니다.
특히 영천 할매집과 포항집은 유세중인 정치인들이 서민적 이미지 홍보를 위해 전략적으로 들릅니다. 얼마전 한나라당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대구 세몰이 때 영천 보리밥집에 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영천집은 김대중, 노무현, 이회창 등이 지지자들과 방문해 시장 상인들 사이엔 '대통령 보리밥집'으로 불립니다.
1985년 9월 여기에 깃을 튼 정용자씨, 부잣집에 시집왔을 때만 해도 보리밥집 주인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습니다. 남편 사업이 파산되자 어쩔 수 없이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네요. 처음엔 곰탕집으로 유명했습니다. 하절기엔 비빔밥도 팔았는데 8년쯤 하다가 보리밥집으로 변신합니다. 지난해 이 상가가 현대식으로 리모델링돼 조금 산뜻하게 변했지만 초창기엔 너무 초라해 식당이라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이재민 식탁 같았습니다. 나무 탁자에 비닐 두르고 식탁으로 사용했습니다. 냉장고도 언감생심이었습니다. 통 얼음 들어간 아이스박스에 반찬넣고 가스 대신 연탄불을 피웠습니다. "맛있다"는 소리를 더 듣고 싶어 하나둘 반찬을 늘려나갔습니다. 현재는 생나물·채소류를 비롯해 건새우, 고등어 등 무려 25가지 이상 반찬을 내는 '보리밥 뷔페 스타일'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시설은 여전히 옹색합니다. 간이 냉장고 3대를 잇대 그걸 식탁으로 사용하고 의자도 등받이 없는 추억의 나무의자를 3개 붙여놓았습니다. 다른 업소도 다 그런 스타일입니다.
손님이 몰려들면 20명이 촘촘히 엉덩이를 맞대고 앉습니다. 남녀의 몸이 접촉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 광경을 뒤에서 보니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습니다. 여기선 '인심도 반찬'이라네요. 주인들은 늘 "한 그릇 더 들어라" "부족한 게 있으면 말해라"고 당부합니다. 그 인심 때문에 단골이 이어집니다. 소문은 서울의 미식가들까지 일부러 KTX타고 여기 와서 점심 먹고 상경합니다. 한 그릇 먹어도 열 그릇 먹어도 가격은 2천원대입니다.
영천집 부엌을 들여다 봅니다. 가스버너가 7대, 크고작은 백철솥이 올망졸망 앉아 있습니다. 보리밥만 하루에 열두 솥을 해대야 합니다. 꽁보리밥에서부터 쌀밥이 한 솥에 다 들어있습니다. 스테인리스스틸 그릇에 밥을 퍼담을 때 취향대로 보리밥의 비율을 조정합니다. 반찬 그릇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손님은 입맛대로 집어가 먹으면 됩니다. 국도 매일 바뀝니다. 냉국, 미역국, 소고기국, 재첩국, 시래기국, 북어국 등. 하지만 약한 가스불 위에 놓인 된장국만은 매일 올라옵니다. 제가 간 날 경상도의 명물 콩잎장아찌까지 보였습니다.
새벽 손님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오전 5시면 첫손님을 맞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워낙 다양한 음식이 있다보니 신세대 부부들은 반찬만들기 귀찮아 신천 조깅 뒤 여기서 식사를 해결하기도 하고, 집들이 온 손님까지 몰고와 회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두 명의 찬모는 자기 식사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쪼그려 앉아 식사하다가 손님이 오면 밥을 떠주고 다시 '토막 식사'를 합니다. 모자라는 반찬이 있으면 즉시 만듭니다. 무채 등 인기 반찬은 하루에 2~3번 만든다네요.
이 거리에서 발견한 짠한 사실 하나. 포항집 주인 손경연씨의 두 며느리(양태자, 김대희)가 시댁의 가업을 묵묵히 지켜가는 것입니다. 영천집(423-9175), 포항집(424-6768), 냉면집(424-4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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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보리밥 주인 정용자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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