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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시장 뒤안길 기웃거리기
대구시 동구 파티마 병원 바로 서쪽 골목에 형성된 대구시 동구 신암1동 평화시장.
현재 찜질방 궁전라벤다(옛 궁전예식장) 맞은편에 있는 이 시장 언저리는 일제 때 포항~영천~동촌~아양교~칠성시장으로 연결되는 신작로변이었습니다. 신암동은 오랫동안 잘 나가던 칠성동과 동촌 사이에 추레하게 놓여있었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그 근처는 미나리, 뽕나무, 감나무 등뿐인 허허벌판이었죠. 있는 건물이라고는 고작 1930년쯤 대구공립직업학교로 출발한 대구공고뿐이었습니다. 69년 동대구역이 허름하게 영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인근에 주택가가 조금씩 형성됩니다. 38년전에 태어난 평화시장도 그런 흐름과 맞물려 신암동 주민들의 찬거리를 다양하게 제공해주었답니다. 그런데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평화시장은 깊은 수렁에 빠집니다. 그때 다크호스처럼 나타난 업소가 있었으니 바로 '삼아통닭'이었습니다. 삼아는 옹달샘이 대하(大河)를 만들 듯 평화시장이 '닭똥집 골목'으로 성장하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이제 닭똥집골목은 평화시장보다 더 유명합니다. 대구시는 지난해 가을, 이 거리를 '닭요리 전문 명물거리'로 지정하고 CI 작업을 거쳐 풍물거리 간판 31개를 달아줬고 지난 8월말쯤엔 동구청 위생계가 업소당 3개의 위생모를 나눠줬답니다.
# 도대체, 어떻게 생겨났지? 이 골목
2005년 2월23일 '꼬꼬하우스'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태조왕건에서 박술희 역을 맡았던 탤런트 김학철씨였습니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닭똥집 골목을 전혀 몰랐습니다. 한 택시 기사가 그를 동대구역 앞에서 그곳으로 데려가줬던 모양입니다. 그는 그 맛에 반해 거나하게 취할 정도로 많은 술을 마시고 일어섰답니다. 전유성은 '똥집본부', 가수 이훈은 '아가씨와 건달들'에 왔다갔습니다. 이젠 손님으로 온 유명인한테 사인받고 기념촬영하는 건 이 바닥의 중요한 영업전략입니다.
이제 이 골목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죠.
지금은 식당업에서 손을 뗀 이두명·나춘선 부부. 둘은 72년 현재 '삼아통닭' 자리에서 '도계(屠鷄)업'을 했습니다. 도계업이란 닭을 잡아 털과 내장을 뽑아 바로 요리할 수 있게 장만해주는 일이죠.
그 무렵 아침마다 평화시장 앞거리에는 인력시장이 섰습니다. 일 자리를 못 잡은 이들은 낙심한 맘을 술로 달래기 위해 골목 안 삼아로 갔습니다. 부부는 막노동꾼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고려, 싸게 먹을 수 있는 술안주를 개발했습니다. 한 접시에 1천원선인 닭똥집 튀김이 그렇게 탄생됩니다. 막노동꾼들 사이에 '삼아 닭똥집은 싸고 맛있다'는 입소문이 납니다. 차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목로주점으로 변해갔습니다.
역시 돈 되는 곳에 사람이 몰리는가 봅니다. 평화시장 상인들이 집단적으로 닭똥집으로 업종을 변경합니다. 그렇게 해서 포항치킨·꼬꼬하우스·똥집본부·평화통닭·제일통닭이 '1세대 닭똥집'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젠 이들 상호 옆에 '원조'란 단어를 붙입니다. 삼아는 그뒤 두 번 주인이 바뀝니다. 그곳에서 일했던 한 종업원이 식당을 인수해 삼아의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90년대 중반쯤엔 업소가 무려 58개로 폭증했습니다. 현재는 약 28개 업소가 몰려있습니다. 정겨운 상호를 열거해봅니다.
뉴신암, 은행나무, 대구, 진미, 오동나무, 명동, 영천, 닭들의 잔치, 합천, 우정, 내왔수다, 포항, 궁전, 운수좋은 날, 부산,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만남의 광장, 고인돌, 추억만들기, 아로마하우스….
# 90년대 이후엔 신세대톤으로 변해
멀리서 보면 '한 색'인데 가까이 가보면 '여러 색'입니다.
먹거리 골목도 그렇습니다. 거기에도 '기압골'이 있습니다. 장사가 좀 잘 되면 '고기압', 안돼 우중충하면 '저기압'. 주파수로도 상권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 386세대 이상 올드 세대가 몰리면 'AM', 20~30대가 몰아주면 'FM'쯤 되겠죠. 이 골목 상권도 시류에 따라 조금씩 이동했습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원조집이 모인 광장형 골목에 손님이 몰렸습니다. 하지만 95년부터 골목 상권이 양분됩니다. 닭똥집 골목의 분위기를 완전 쿨하게 변모시킨 무서운 업소 때문입니다.
경북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중구 공평동 밀리오레 동편 골목에서 문인들을 위한 카페 시인을 운영했던 김은희씨(39)가 차린 '아가씨와 건달들'입니다. 김씨 모친도 그 골목에서 닭똥집을 꾸려갔습니다. 손님층을 분석했습니다. 중년층 이상이었던 예전과 달리 90년대 들면서 급격하게 젊은층이 늘고 있다는 걸 눈치챘습니다. 그 어름 '신세대'란 용어가 새로운 문화 아이콘으로 부각되던 시점이었습니다. 김씨는 속으로 '신세대를 위한 닭똥집을 만들자'고 다짐합니다.
# 초저녁엔 중년층, 심야엔 젊은층 북적
상호부터 혁신시킵니다. 당시 대다수 상호는 'OO통닭'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씨는 신세대 취향인 아가씨와 건달들로 정했습니다. 인테리어도 남달랐습니다. 여느 집과 달리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철제 의자를 갖다놓았습니다. 여느 집은 흐름한 선술집 같았는데 여긴 레스토랑 같았습니다. 기성세대들은 "닭똥집이 왜 이래", 신세대들은 "오 마이 갓!"이었습니다. 주위에선 원조 골목보다 어둡고 행인들도 적었던 그곳에 싹을 뿌린 아가씨와 건달들이 곧 망할 거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승승장구했죠. 다른 주인들도 동요됩니다. 슬그머니 아가씨와 건달들의 인테리어 라인이 카피되기 시작합니다. 현재 대다수 업소의 의자 색은 빨강이고 모양도 흡사합니다.
같은 메뉴밖에 없는 먹거리 타운 경쟁 업소 주인들은 남이 뭘 하는 지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돈되는 건 뭐든지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거리가 통일감있게 진화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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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초부터 형성돼 한때 60여개 업소가 모여든 대구의 명물 동구 신암1동 평화시장 닭똥집 골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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