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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는 듯 없는 듯한 시장입니다
대구시 동구 신천 3동 황실호텔 맞은편 동대구 역전 시장.
올해 나이 설흔을 조금 넘겼습니다. 요즘 죽을 맛이라네요. 한 달에 관리비조로 3천원을 내는 30여명의 시장 상인들에겐 근처 주택가 재개발 사업이 눈엣가시 같습니다. 현재 청아람 아파트 등 3군데에 아파트 공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민이 감소되니 장사가 안 될 수밖에요. 앞으로 3년간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버티든지 아니면 업종 전환을 해서 다른 곳으로 가 장사를 하든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낮 12시의 시장. 장바구니 든 아낙들의 모습이 별로 없습니다. 시장이 들어선지 3번 지붕을 갈았다고 하는 콘크리트조 시장 상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복판에 10여개의 좌판이 깔려있습니다. 이 중 문을 연 건 고작 3개밖에 없었습니다. 안동 출신으로 이 장터 한 모퉁이에서 국수를 팔다가 지금의 점포를 얻게 된 서모씨(65). 인근 주택가 재개발로 인해 하루 1만원 벌이밖에 안된다고 한숨을 내쉽니다.
좌판 주위로 식당이 몇개 붙어 있습니다. 초창기 멤버인 오뚜기 식당(752-7526)·영덕식당·장수 맛집(741-2780)이 있고 참기름 집은 두 곳(영주와 서부)이 있습니다.
거기서 시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품을 가진 식당 여주인을 만났습니다. 제주도 모슬포 출신 오정숙씨(56)가 꾸려가고 있는 장수 맛집의 히트 메뉴는 갈치정식(8천원)과 버섯전골(8천원). 하지만 8천원은 아직 서민들에겐 부담이죠. 그래서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저렴한 '슬림형 버섯전골'을 개발했습니다. 불고기 뚝배기(3천원). 이건 굽는 게 아니고 끓여먹는 전골형 불고기입니다. 이집 갈치는 믿을만 합니다. 오씨의 오빠가 고향 바다의 갈치잡이 어부라네요. 원할 때마다 항공편으로 제주산 갈치를 공수합니다. 1인분에 두 토막 들어갑니다. 매일 뺀 육수에 무, 두부, 감자, 대파, 풋고추, 버섯 등이 들어갑니다. 참 이 기회에 냉동 갈치 구분법을 알려드릴 게요. 일단 젓가락으로 살점을 뜯어냈을 때 흰색이 아니고 갈색이거나 동태처럼 살점이 딱딱하면 생물이 아니니 주인한테 따지세요. 이집은 인심도 후해 공기밥을 1천을 받고 팔지 못해 무료로 줍니다. 관상을 볼 때 편히 살 것도 같은 데 얼마전 30대초의 딸 한 명을 백혈병으로 저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큰 빚을 떠안게 돼 기존 건어물만 갖고는 생계가 안돼 어쩔 수 없이 식당을 하게 됐답니다. 시장에 국밥집이 없으면 안되죠. 여기도 한 군데 있습니다. 의성 출신 신낙섭 할매(72)와 며느리 황미연씨(42)가 함께 꾸려가는 상주식당(745-7258)입니다.
백반집 아줌마들만큼
한식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이도 드뭅니다.
그들은 퓨전요리에 능한 신세대들과 달리
요리에 대한 응용력이 대단합니다.
요리학원 한번 구경하지 못했지만 원하는 요리를 척척 해냅니다.
# 백반 정식 진수 전하는 할매식당
할매식당(752-4309).
이 시장의 터줏대감입니다. 이 시장의 역사와 함께 했습니다. 근처 입맛 까다로운 사무실 직원들이 단골층을 형성했습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6·25 때 대구로 피란 온 정무근 할매는 지난 해 작고했습니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엄하게 가사법을 배운 맏며느리 조현선씨(51)가 대구로 시집 와서 가업을 이었습니다. 남의 손을 믿지 못해 여동생과 함께 일합니다. 정씨 할매는 초창기 이 시장통 한 켠에서 분식집을 꾸려갔습니다. 특히 소피국, 손수제비 등이 인기가 좋았습니다. 너무 잘 돼 상인들의 시샘도 받았습니다. 80년 현재 자리로 와 식당을 오픈합니다.
조씨는 "경남 음식은 섬세하고 각종 양념을 재료별로 구분해 사용하는데 경상도는 대충 집어넣고 만드는 바람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면서 대구 음식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이집 메뉴는 거의 4천원짜리입니다. 가장 만만한게 쌀뜨물을 육수로 활용한 우거지 국이 따라나오는 백반정식입니다. 밥도 윤기가 돕니다. 회식당 매운탕에 따라나오는 밥, 너무 찰기가 없어 선풍기 앞에 내놓으면 밥알이 날아갈 것 같죠. 고급 쌀을 사용한 건 표시가 납니다.
여기 반찬은 모두 식당에서 직접 만든 겁니다. 그러니 요즘 젊은 조리사들은 이런류의 식당을 그냥 줘도 못 지탱합니다. 지난 김장철엔 배추 500포기를 샀고, 참기름도 중국산 참깨지만 고향 오빠가 직접 씻고 말려 짜 보내줍니다. 된·간장도 직접 만듭니다. 음식에 이골이 난 조씨의 눈은 정확합니다. 너무 빨간 고춧가루가 중국산이란 것도 단번에 압니다. 국내산은 붉지만 조금 어두운 기운이 감돌죠. 찹쌀 수제비에는 정씨 할매의 노하우가 섞여 있습니다. 고향에서 갖고 온 찹쌀 2가마를 갈아 2~3되씩 익반죽해 비닐에 사서 냉동보관 해둡니다. 1인분엔 새알심이 23개쯤 들어갑니다.
기본 육수가 중요하죠. 매일 충무 멸치, 무, 대파, 다시마 등을 넣어 3시간 끓여 국수·수제비·된장·갈치찌개 용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동태찌개는 육수 대신 맑은 물과 소금·된장만으로 맛을 냅니다. 된장찌개도 큰 프라이팬에 육수를 넣고 펄펄 끓인 뒤 작은 뚝배기에 담아내고, 고춧가루도 다 끓어갈 때 살짝 넣습니다. 솔직한 조씨가 기자를 주방으로 부릅니다.
"화학조미료를 너무 많이 넣어도 문제지만 전혀 사용하지 않아도 맛이 나지 않는다"면서 극소량의 조미료를 국자에 떠담는 걸 공개했다. 제가 만난 조리사 중 조미료 사용하는 걸 뜻뜻하게 고백한 첫 사람입니다. 하여튼 백년손님, 사위를 생각해 만든 밥상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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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국을 끓이고 있는 할매식당 주인 조현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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