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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시장의 명물 추어탕집으로 유명한 신원상회 앞은 매일 오후 3시부터 추어탕 사려는 손님들로 장사진을 친다. |
# 금방 끓여 팔기에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음식만 먹지 바쁜 데 취재는 무슨 취재…."
수성시장 명물 추어탕(이하 추탕) 할매가 전화를 끊으면서 혼자 주절거리는 말이 살짝 들렸습니다. 추탕 할매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취재한 대상 중에서 가장 난감한 어른이었습니다. 할매는 자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세상 물정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추탕 할매는 제가 음식담당 기자라고 하니깐 대뜸 불편한 심기를 또 쏟아냅니다.
"실제는 맛이 없는 데 신문방송에 소개되는 바람에 맛있는 식당으로 불리는 곳도 많잖아"
추탕 할매는 너도 그렇고 그런 기자가 아니냐는 속내를 드러냅니다. 자기는 너무 바빠서 취재할 겨를이 없기 때문에 그냥 음식만 먹고가라고 매정하게 대합니다. 대충 이렇게 기자에게 막 대하는 할매들이 실은 실력파이고 속정도 풍성하죠. 할매는 뭘 속이지 못합니다. 원가 개념도 희미합니다. 먹는 음식인데 좀 더 주고 싶고, 좀 더 고급스러운 식재료를 사용합니다. 꼭 귀한 사위를 위해 끓인 추탕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맛을 지켜가기 때문에 굳이 타인에 대해 입의 혀처럼 대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할매는 손님을 가족으로 여깁니다. 대형할인매장만 해도 손님에게 온갖 상술을 다 쏘아댑니다. 하지만 전통시장은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풋풋함이 남아 있습니다. 혈족한테 상술이란 걸 들이밀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일반 시장 상인들의 말투가 여느 매장과 달리 투박해 보이는 지도 모릅니다.
요즘 수성시장 동편은 현재 아파트 하늘채의 공사가 한창 진행중입니다. 이 시장도 머잖아 재개발에 들어갈 것 같네요.
수성시장은 따로 주차장이 없습니다. 노상에 45도 각도로 차를 세워두고 장을 봐야 됩니다. 이 시장에는 지나치면 알 수 없는 숨은 먹거리가 많습니다. 특이한 건 즉석 먹거리 음식이 풍부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청도 추탕 할매집'으로 불리는 신원상회는 5년전만 해도 즉석김치 전문점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매는 김치로 큰 재미를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4년전부터 경상도식 추탕을 끓여 팝니다. 식당은 아니고 그냥 추어탕만 끓여 팝니다. 오후 3시쯤이면 상회 앞에 진풍경이 벌어집니다. 이때부터 아침 일찍 장만 중인 각종 재료가 백철솥에 한꺼번에 들어가 펄펄 끓기 시작합니다. 저마다 국을 먼저 사가려고 1시간 일찍 줄을 섭니다. 오후 4시가 되면 20~30명이 장사진을 치고 오후 4시30분부터 국을 팔기 시작합니다.양도 많아 5천원만 주면 온 식구가 한끼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단골들은 너무 고마워합니다. 그게 고마워 할매는 자꾸 주는 양이 많아지고 그래서 이윤도 박해집니다. 여기선 추탕 외에도 고디탕, 그리고 직접 담근 김치와 콩자반도 팔고 있습니다.
도와주는 이도 없습니다. 거동이 부족한 70대 노부부가 밀고 당기면서 국을 끓입니다. 할매는 곧 쓰러질 정도로 지독한 관절염을 앓고 있습니다. 국만 사가는 사람들은 국이 만들어지기까지 힘든 조리과정에 둔감합니다. 아침 일찍 어두컴컴한 시장통에서 파도 다듬고 가을배추를 일정한 크기로 썰어둡니다. 미꾸라지는 굵은 소금 네 움큼을 집어넣어 숨을 끊습니다. 할매는 펄펄 끓는 물에 미꾸라지를 집어넣고 1시간쯤 푹 삶기 전에 많게는 15번 미꾸라지를 치대면서 거품을 말끔히 제거합니다. 거품기가 남아 있으면 나중에 국에 거품이 많이 생겨 국맛을 버리게 만듭니다. 국도 종일 팔지 않습니다. 1시간30분 정도만 팔고 문을 닫습니다. 큰 바가지 한 그릇에 5천원, 3천원어치도 팔지만 할매는 인심이 후해서 늘 많이 줍니다. 그렇지만 재료는 아무 것이나 사용하지 않습니다. 수성시장 물건도 좋으련만 할매는 굳이 북구 팔달시장의 배추와 수염이 나고 주둥이가 뾰족한 국산 미꾸라지만 고집합니다. 추탕은 한번 끓였을 때가 가장 맛이 좋습니다. 일단 하루 묵힌 뒤 끓이면 국물맛은 이내 텁텁해집니다. 그런데 우린 확률상 제때 끓인 건 거의 맛볼 수 없습니다. 여느 추어탕집 국도 거의 하루 묵힌 거라 보면 됩니다. 왜 시장 근처 주민들이 1시간 이상 기다리는 지 그 이유를 알듯 합니다.
이 집 추어탕이 잘 되는 걸 보고 옆에 몇몇 추어탕이 들어왔지만 다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현재 이 시장 내에서 추어탕을 취급하는 곳은 다섯집. 7년 역사를 가진 숲속시장, 문패없는 봉화 출신의 김씨 할매 추어탕, 수성식당 등입니다. 김씨 할매집엔 소피국도 끓여 팝니다. 위생 비닐에 국을 담아주는데 사러갈 때 큼지막한 냄비를 들고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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