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7] 기생의 삶을 탄식한 가수 이화자

  • 입력 2007-11-01   |  발행일 2007-11-01 제20면   |  수정 2007-11-01
작부에서 민요의 여왕으로 기박한 삶 '타령'
윤기·탄력 있는 목소리에 넋두리조 한탄 담은 '신민요' 히트
'어머니전 상백' '화류춘몽' 등 자서전적 가사로 민중 애 끊어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7] 기생의 삶을 탄식한 가수 이화자
마약중독으로 초라한 죽음을 맞은 이화자.

한국가요사 초창기에는 기생 출신들이 제법 많이 가요계로 진출했습니다. 그 까닭은 가수를 지망하는 사람을 민간에서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딴따라, 풍각쟁이라며 천시하던 풍조로 가득했던 시절, 그 누가 감히 가수되고 싶다는 꿈이나 꾸었을까요.

그런데 1930년대 중반 경기도 부평의 어느 술집, 술상 앞에서 노랫가락을 특히 잘 부르는 작부(酌婦)가 있다는 소문이 서울 장안에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술꾼들로부터 입소문이 난 여성 가객은 다름 아닌 이화자(李花子·본명 이원재)였습니다. 훗날 민요계의 여왕이 되어서 그 평판이 높았던 가수입니다.

이화자의 노래를 다시금 귀 기울여 들어보면 자르르 흘러내리는 듯한 윤기에다 팽팽한 탄력이 가히 일품입니다. 주로 기박한 신세를 넋두리조로 한탄한다거나, 서민들 가슴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삶의 피로와 체념, 애달픔이 눅진하게 묻어나면서 사무치는 공감으로 젖어들게 하는 호소력을 지녔습니다.

이화자는 권번이나 정악전습소 등에서 정식으로 수련을 받은 기생도 아니었고, 그저 팔자가 기구하여 이 거리 저 거리 물풀처럼 떠돌던 중, 안목이 뛰어난 작곡가 김용환(필명 김영파)에게 발탁이 되었던 것이지요. 김용환과 이화자는 이렇게 맨 처음 술집 손님과 작부의 관계로 만났습니다. 어린 작부는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앉아 무료한 표정으로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는군요.

경기도 부평 출생이라지만 이도 확실치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를 이화자는 평생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1916년 어느 빈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술집에 맡겨져 더부살이를 해온 듯합니다. 이런 그녀의 애환이 가요 창법과 음색에서 왜 묻어나지 않았겠습니까. 이화자가 뉴코리아레코드사를 통하여 가수로 첫 데뷔한 것은 1936년, 이화자의 나이 20세 때의 일입니다. 그녀가 불렀던 '초립동'은 신민요 스타일의 작품으로 가요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노래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전국의 레코드 상점 앞에 모여선 광경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화자의 사진과 노래 가사지가 인쇄되어 전국의 레코드 상점으로 속속 배달되었습니다. 뉴코리아레코드사 소속으로 있던 이화자는 인기가 솟구치면서 자연스럽게 포리도루레코드사로 옮겨가게 됩니다.

당시 포리도루는 왕수복, 선우일선 등을 비롯하여 유명 기생 출신으로 가수가 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신민요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신민요곡들을 발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화자는 '네가 네가 내 사랑' '조선의 처녀' '실버들 너흘너흘' '아즈랑이 콧노래' 등을 불러서 히트를 했는데, 주로 조선 중엽 이후 서민들에 의해 즐겨 불리던 잡가 스타일의 민요를 많이 취입했습니다. 작사가 조명암과 작곡가 김용환은 이화자 노래의 효과를 제대로 살려내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말 그대로 이화자의 노래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버들 숲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조선의 콧노래였습니다. 그것은 제국주의 압제 속에서 우리 민족이 잃어버린 전통의 가락이었고, 삶의 애환을 되살아나게 하였습니다.

이화자의 인기가 상한가를 치게 되자,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은 이화자를 만나 거액의 전속료를 제시하고 포리도루사에서 소속사를 바꾸도록 했습니다. 오케로 옮긴 이후 이화자는 신민요 '꼴망태 목동'(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손목인 편곡, 오케레코드 12190)과 '님 전 화풀이' 등 특급 히트곡을 잇따라 냈습니다. 1939년, 스물 셋에 발표한 '어머님전 상백'(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 오케 12212) 음반에는 자서곡(自敍曲)이란 장르 명칭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떠돌이 술집 작부로 살아온 가수 이화자의 삶과 애달픔을 마치 자서전처럼 고스란히 담아낸 노래라 할 수 있었지요. 절절한 한과 애달픔이 눅진하게 묻어나는 이 노래는 듣는 이의 간장을 토막토막 썰어내는 단장곡(斷腸曲)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나이까/ 복모구구 무임하성지지로소이다/ 하서를 받자오니 눈물이 앞을 가려/ 연분홍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나이다.



같은 해에 이화자가 취입했던 대표곡으로는 '네가 네가 내 사랑' '실버들 너흘너흘' '노래가락' '범벅타령' '삽살개 타령' '망둥이 타령' '금송아지 타령' '십오야 타령' 등입니다. 곡명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이화자의 노래들은 거의 대부분 신민요 스타일의 창법으로 '타령'조를 즐겨 불렀습니다. 술집마다 거리마다 이화자의 노래는 줄곧 흘러나왔습니다. 보잘 것 없었던 시골의 술집 여인은 하루아침에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는 가수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1940년 봄, 이화자는 자신의 전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절절한 노래 '화류춘몽'(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오케 20024)을 발표합니다. 이 노래는 모든 화류계 여성들의 기막힌 처지를 그대로 대변한 작품이었습니다. 평소 담배를 많이 피우는 버릇이 있던 이화자는 아편에 슬금슬금 손을 대기 시작하다가 차츰 중독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순회공연 중에도 아편이 떨어지면 온갖 소동을 부렸습니다. 우리 민족사에서 암흑기였던 1942년은 이화자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암흑기였던 것이지요. 이 무렵에 취입한 친일가요 '목단강 편지'가 그녀의 마지막 히트곡이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이미 마약중독자 이화자에게 8·15는 감격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비참한 생활고와 고독만이 그녀의 앞에 빈 밥그릇처럼 휑뎅그렁하게 자리잡았을 뿐입니다. 몸과 마음이 형편없이 망가진 이화자는 서울의 종로 단성사 뒷골목 단칸방에 월세를 얻어서 오로지 아편으로만 세월을 잊으려 했습니다. 불과 30대 초반의 한창 고왔을 여인은 마치 할머니의 얼굴처럼 늙어보였다고 합니다. 6·25전쟁이 나던 해, 이화자는 차디찬 방에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홀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남긴 음반 '이화자걸작집'은 지금도 다음과 같은 세리프를 잡음 속에서 애타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꽃다운 이팔소년 울려도 보았고/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이것이 화류춘몽의 슬픈 얘기다/ 기생이라고 으레 짓밟으라는 낙화는 아니었건만/ 천만층 세상에 변명이 어리석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7] 기생의 삶을 탄식한 가수 이화자
1930년대 평양기생학교 모습.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7] 기생의 삶을 탄식한 가수 이화자
1910년대 성장한 기생들.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17] 기생의 삶을 탄식한 가수 이화자
이화자를 가요계에 데뷔시킨 김용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연예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