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팔공산 한정식 식당 노고추 이야기

  • 입력 2008-02-22   |  발행일 2008-02-22 제37면   |  수정 2008-02-22
"식당 옆에 텃밭과 장독간 있어요!"
시어머니 보내준 콩으로 빚은 흑두부
텃밭에서 키운 배추로 빚은 보쌈 김치
모듬 버섯이 어우러진 구절판 인기몰이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팔공산 한정식 식당 노고추 이야기
사찰요리 같은 즉석 제철 한식과 차, 그리고 온갖 장류가 어우러진 팔공산 '웰빙 먹거리 타운' 노고추 안채 전경.

"저, 장인이 아니고 그냥 돈많이 벌고싶은 장사치라예. 너무 고상하게 적지 마세요."

이미 지역 식도락가 사이에선 괜찮은 식당이라고 소문난 경산시 와촌면 음양리 팔공산 한정식 전문 노고추(老古錐)의 여사장 배명자씨(55). 제가 노고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자 연근과 수삼 정과를 툇마루에서 말리고 있던 배씨가 자꾸 배시시 웃으며 겸손해 합니다. 디저트용으로 만든 정과인데 설탕이 너무 많이 들어가 생각만큼 작품이 좋지 않아 속상해 합니다. 선이 분명한 콧날에 까탈스러운 성정이 담겨 있습니다. 일이 생기면 숨겨진 기질이 불칼 같이 일어섭니다. 사전에 예약하지 않고 느닷없이 찾아오면 대통령이라도 정색하고 '방 없다!' 할 사람이죠. 예약제를 고수하는 건, 오는 사람에게 최고 정성의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소망이겠죠. 실제 몇몇 고위 인사도 그녀에게 무안을 당했던 모양입니다.

# 식당인가, 법당인가?

봄·여름이면 배씨는 자면서도 텃밭을 서성거립니다. 겨우내 동면했던 온갖 먹거리가 기지개를 켜면서 야단법석이기 때문이죠. 아욱, 근대, 호박, 상추, 당근, 파, 쑥갓, 도라지, 케일, 가지, 고추, 배추….

"어렵겠지만 가능한 한 제가 직접 재배한 농산물과 믿고 산 식재료로 즉석요리를 만들어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럼 덜 남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원가에 매달리면 이미 그 주인도 갈 데까지 간 거라고 봐야겠죠."

메주·두부·된장·간장용 콩은 대구 살다가 충청도 부여로 간 85세 시어머니가 직접 농사지어 며느리에게 보내준 것입니다.

참, 노고추란 상호, 참 매력있죠. '오래된 송곳'이란 뜻인데 자신도 '오래도록 빛나는 송곳 같은 유서깊은 음식을 만들겠다'는 서원이 담겨있습니다. 사실 요즘처럼 신용카드 시절, 잔손 많이 들어가는 한식당, 남는 게 거의 없습니다. 죽어라 고생만 하다가 결국 문닫기 십상이죠. 배씨도 5~7년 고생할 각오를 했답니다.

# 노고추를 찾는 사람들

여기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동구 백안삼거리 지나 수성구 예비군 훈련장을 지나 대구와 경산의 경계에서 좌회전해 올라가면 됩니다. 일반 손님은 거의 없고 단골뿐입니다. 풍광은 정정합니다. 툇마루에 앉으면 환성산 자락, 뒷산은 김유신과 연관된 명마산입니다. 암산(岩山)이라 터 기운이 센 듯 합니다. 솔직히 식당보다 법당 같습니다. 그녀의 옹골진 기질 아니라면 오래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잔디가 깔린 마당 한 가운데 서면 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좀 특별한 구석이 있습니다. 거의 번잡한 걸 싫어하죠.

신부, 목사, 스님 등 각계 성직자들이 주 단골입니다. 거기에 입맛 까다로운 고위 공직자, 대학교 총장, 박물관장, 요즘 들어선 쿨한 기질의 젊은 데이트족까지 가세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음식 간이 심심하고, 재료 의 질감이 소스에 의해 가려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경상도 음식과 달리 맵지도 짭지도 않습니다. 사찰요리 같습니다. 그래서 특히 서울 손님한테 인기입니다. 술을 팔지 않아서 그런지 사업가들은 여기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한번 오곤 다시 안온다네요.

처음 온 손님들은 노고추의 정체를 탐색합니다. 포장되지 않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가로지른 비뚤비뚤한 가교를 건너면 왼편에 식품 판매장이 보이고 맞은편에 별채가 보입니다. 중앙에 대웅전처럼 생긴 만선암(萬善岩)이 있습니다. 여기가 식당입니다. 만선암이란 현판만 보고 법당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본채와 별채 사이에 다실이 있습니다. 그녀는 20년째 행다(行茶)를 합니다. 1991년 다도 사범이 되고, 현재 명정차회 를 이끌며 매월 둘째 화요일 노고추 다실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아들 홍영기씨(31)가 한서대 건강차 정진학과 졸업후 다도 수업에 이어 바리스타(커피 전문가) 과정까지 수련, 가업을 이을 모양입니다.

외형은 별장, 내부는 한옥 스타일입니다. 안방에 테이블 셋, 건넌방에 둘, 대청에 둘이 있습니다. 대청 한 켠에 현악기 소리를 잘 뿜어내준다는 탄노이 스피커가 보입니다. 툇마루에 앉으면 200여개의 옹기군이 보입니다. 옹기마다 장과 메주 담근 날짜가 적혀있습니다.

여기서 보는 낙조가 괜찮죠, 오후에 일부러 석양 보며 음식 먹으려는 단골도 있습니다.

# 노고추 식단 대해부

앉으면 묘한 맛의 차를 내줍니다.

여느 집과 맛이 다릅니다. 한 가지 재료만으로 끓이면 쉽겠죠. 그게 아닙니다. 뽕잎과 느릅나무, 칡뿌리, 생강나무, 대추 등을 넣고 달였습니다. 차보다 약 같습니다. 정성이죠.

죽과 물김치가 함께 나오고 다음엔 직접 만든 이 집의 명물 흑두부가 배추 겉절이에 섞여 나옵니다. 전채 요리인 셈이죠. 두부 굳힐 땐 서해 안면도 천일염에서 뺀 간수를 사용합니다. 이어 본음식.

갈비, 자연송이구이, 구절판, 홍탁 삼합, 마·더덕구이, 보쌈 김치, 전복찜, 수삼채…. 마지막에 연잎밥과 우거지 된장, 배추 등으로 식사합니다. 메뉴가 상품보다 작품 같습니다. 특히 노고추 구절판이 그렇습니다. 표고 밑둥치, 새송이, 팽이버섯, 느타리버섯, 계란 지단, 고기 대용의 가지, 대추, 더덕, 당근, 호박이 어우러집니다. 꼭 버섯들의 합창 무대 같습니다.

밤, 대추, 배, 무, 잣 등을 넣어 갓 버무린 보쌈 김치는 고춧가루가 거의 없어 꼭 '김치 드레싱' 같네요. 연잎밥엔 완두콩, 땅콩, 잣, 호두, 밤, 대추, 검정콩 등이 섞입니다. 가격도 셉니다. 기본이 1인분 1만8천원, 제일 비싼 게 5만원.

장아찌도 이름값 합니다. 가죽나물, 두릅, 뽕잎, 녹차, 산초, 더덕, 도라지, 감 등. 레스토랑의 디저트 티라미슈 같은 큰 단추만한 구운 찹쌀떡을 직접 곤 조청에 찍어 먹습니다.

2006년 12월 담근 김치를 먹어봤습니다. 섬유소가 그대로 씹힙니다. 배추도 텃밭에서 키워서 그런지 꼭 봄동 같습니다. 멸치 액젓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초피를 섞습니다. 김치 맛을 더 내기 위해 충청도 광천산 육젓을 손님 안 붐비는 추석전에 현지로 가서 1년치 사옵니다.

식당도 고생인데 식품사업까지 벌였습니다. 된장, 간·고추장, 장아찌, 간장소스, 김치 등을 '노고추 음식공방'이란 브랜드로 팔고 있습니다. 이런 포맷의 한식당은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노고추의 매력 ? '우일신(又日新)정신'이겠죠.

이제 됐다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새로워지겠다는 '깡'. (053)853-7722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팔공산 한정식 식당 노고추 이야기
수삼 정과를 썰어 말리고 있는 여사장 배명자씨.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팔공산 한정식 식당 노고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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