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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곡식.
사람들은 그것에 외경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 차례 등 다양한 예를 올려보는 거죠. 햇곡식이
'상품'으로 건너뛰면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거룩한 구석은 없어지고 자꾸 거창해지죠. 경쟁자를 따돌리고 더 많이 팔려면 남다른 상술이 필요하죠.
'유럽의 막걸리'였던 와인. 이놈이 '꿈의 술'로 지구촌을 쥐락펴락해버렸습니다. 이에 뒤질세라 미국, 칠레 등 신세계 와인이 낮은 가격을 앞세워
유럽의 아성에 도전합니다. 프랑스에서 다시 강공 마케팅을 구사합니다. 유통기한 6개월 정도 밖에 안되는 햇와인 갖고 '보졸레 누보 마케팅'을 짠
거죠. 매년 11월 셋째주 목요일 자정을 기해 한날 한시에 프랑스 보졸레 지방의 포도 가메(Gamey)로 만든 와인을 전세계에 유통시킵니다.
1951년 프랑스에서 시작됐고 85년 프랑스 정부에서 보졸로 누보 데이를 공식 선포합니다.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합니다. 한국이 보졸레 누보에
가장 열광하는 한 나라가 돼버렸습니다. 어제 2008년 보졸레 누보 좀 맛봤습니까.
한국의 첫 와인으로 평가받는 마주앙의 양조술을
가진 영천 (주)한국와인의 하형태 대표도 지난해 처음 '뱅 꼬레(Vin Coree)'를 출시하고 올해 용기를 내 '영천판 보졸레
누보(시제품)'를 내년 1월1일을 기해 내놓을 계획이라네요.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에 이어 국내 최초 와인드라마 '떼루아(황성구
극본, 김영민 연출)'가 SBS 월화 드라마 '타짜' 후속으로 내달 1일 첫 방송됩니다. 와인 영화 '와인 미라클'도 개봉됐습니다. 와인붐으로
대구에도 20여개의 와인바가 생겼지만 아직 경북을 비롯해 한국의 토종와인은 수입와인의 위세에 상당히 눌려있는 것 같습니다.
와인
세상.
입문만 있고 졸업은 없다죠. 저도 그래서 다소 위안이 됩니다. 와인 정복기의 기승전결은 대충 이렇게 되겠죠.
철옹성처럼 다가선 병마개를 딸 줄 알고, 테이스팅할 줄 알고 별도 용기에 더 내 디캔팅할 줄 알고, 음미할 줄 알고, 특정 와인의
태생과정에 대한 정보를 알고, 가장 맛있어지는 숙성 타이밍을 알고, 내친김에 프랑스 보르도로 건너가 고수한테 레슨받고, 전세계 메이저급
유통라인을 알고, 가격의 비밀을 알고, 와인에 맞는 음식도 만들어 보고, 궁극에는 직접 와이너리를 지어 자기 이름을 붙인 와인을 주조해서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이 행복해하는 걸 보면서 햇살 잘 드는 안락의자에 앉아 선율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의 간주곡을 듣는 대목까지.
이번주에는 지역의 와인 고수 한분을 만나봤습니다.
영남대 약대교수로 정년퇴임한 뒤 2006년 3월 결성된 대구 보르도 와인 클럽 초대 회장이 된 정시련 교수입니다. 제3의 인생을
와인과 함께 시작한 내력과 그가 생각하는 와인이 뭔지 알아봤습니다. 정 교수는 현재 영남대 교양학부에서 '음주문화와 와인의 이해', 대구은행
본점 3층 VIP클럽에서 'CEO와인문화', 남구 대명동 영남대 사회교육원에서 '현대인을 위한 와인 교양강좌'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www.yulife.ac.kr. (053)424-4443
-보졸레 누보 맞는 소감은.
"그저 올해도 수많은
와인 중에 하나인 프랑스 보졸레(Beaujolais) 지방의 햇술이 나왔구나 하는 정도이지 그 이상 특별한 소감은 없다."
-프랑스발 '와인 제국주의'에 우리가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공감하나 동의하기 어렵다. 우선
와인제국주의란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와인은 문화이므로 와인이 제국주의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없던 와인이 10여년 전부터
물밀려오듯 들어오면서 아직 일반 대중들은 그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기인된 오해다."
-와인 입문할 때 가졌던 와인에
대한 편견은?
"약대교수를 하다가 와인 교수를 하게 된 계기는 정년퇴직 후 와인투어가이드를 하려고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스쿨에 가서
공부했다. 꼭 40년전 20대 후반의 나이로 유럽에 유학을 갔을 때 난생 처음 와인을 접했는데 사실 그때는 와인보다는 맥주와 위스키를 더
좋아했다. 자꾸 폼 내는 술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즐기는 문화주(文化酒)더라."
-진정 와인 마니아가 두려워해야 할 게
뭐냐. 와인을 마시면 되는 거지, 그 명칭과 이름을 정확하게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지.
"꼭 필요하고 적절한 질문이다. 와인은
즐겨 마시면 된다. 어렵게 생각하거나 또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서구에 기원을 둔 좋은 술이라 생각하면서 상식으로 즐기면 된다.
간단하게 알아둘 내용은 와인이란 포도 100%로만 만든 것으로 물 한 방울, 설탕 한줌도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도 설탕도
첨가하고, 유기산이나 기타 어떤 화학물질도 넣고 만드는 것도 있다. 그런 것들은 규격와인에 들지 못하게 법(유럽연합 및 개별국가 와인법령)으로
규제된다. 와인의 숫자는 하늘의 별 만큼 많으므로 그 이름들을 다 알 수 없다. 다만 지역마다 특징적인 와인이 그 문화적 배경을 갖고 존재하므로
이를 이해하는 정도의 관심을 가지면 된다. 와인의 세계에서 졸업을 한다든가 끝은 없다고 본다."
-초보자들이 와인에 대해
갖는 묘한 불안감은 어디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가.
"첫째 우리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와인용어는 프랑스 언어가
대부분이므로 어렵게 느껴진다. 게다가 와인은 문화적인 배경이 있기에 유럽 문화의 이해가 필요한 데 그게 초보자들에겐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모른 다고 무식하다고 하는 건 잘못 된거다. 영국인들도 와인 잘 모른다. 그러나 그들을 무식하다고 하지 않는다. 모르면 잘 아는 자에게
물으면 된다."
-청도, 영천, 의성, 김천, 봉화 등에도 토종와인이 있는데 수입산만 와인이라고 믿는 이들은 이걸 와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와인이란 포도 100%로 만 만든 거다. 좋은 와인의 조건은 우수한 품종과 이 품종이 자라서 좋은 포도를
영글게 할 수 있는 떼루와(terroir·토양)가 잘 맞아야 하며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진 포도를 잘 선별하고 양조하고 관리하는 와인 만드는
사람들의 축적된 기술과 장인정신이 어우러져야 한다. 우리나라 떼루와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지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토종와인이
보르도와 경쟁해선 승산은 거의 없다. 그냥 지역 특산주로서 그 특징을 살려나가는데 역점을 뒀으면 좋겠다."
-와인이 그렇게
건강에 좋다고 하는데 취재해본 결과 이는 그렇게 공신력 있는 정보는 아닌 듯 한데.
"와인의 의약학적 효능은 여러 가지로 입증된
것이 많다. 그러나 와인도 알코올성 음료이므로 많이 마시거나 남용하면 분명 해롭다. 모든 것은 적절한 게 좋다."
-국내에서 최고 절정의 와인 코스를 접하는 방법은.
"와인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유래하여 유럽에서
꽃을 피운 독특한 문화상품이다. 와인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수치거리나 부끄러움이 아니다. 배워 알려는 마음의 자세만 있으면 된다. 중요한 건
잘못된 지식을 갖고 허풍을 떠는 등 왜곡하는 행위를 경계한다. 우리나라는 최근 와인의 열풍을 타고 검증되지 않은 와인학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다. 와인 교육가는 유럽의 문화와 유럽의 언어 등을 먼저 공부한 다음 와인공부를 해야 되는데 우리는 거꾸로 굴러가는 것 같아 아쉽다. 그냥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야 무방하지만 와인교육을 담당하려면 반드시 공인된 기관을 잡는 게 좋다. 자랑 같지만 제가 운영하고 있는 '영남대학교
사회교육원 와인아카데미'는 작년에 개설한 공공 교육기관으로서 국내 최고를 목표로 훌륭한 강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끝으로
처음 와인을 대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와인은 폼내려고 마시는 게 아니다. 즐기기 위한 술이다. 사람과의 대화를 위한 술이다.
한국 사람들은 취하려 마시는 것 같은데 이제 너무 취하려 하지말고 즐기며 마시는 음주문화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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