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남산동 '도루묵 탁주집'

  • 입력 2009-01-02   |  발행일 2009-01-02 제43면   |  수정 2009-01-02
"놋주발 잔술 한 잔…딱 1천원입니더!"
48년 역사…대구 최고 실비 막걸리집
둘이 오는 것보다 혼자 오는 게 제격
서금란 할매는 타계…딸이 명맥 이어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남산동

◇…서금란 할매 考

서금란 할매.

잘 아세요. 지금은 이승에서는 볼 수 없는 대구의 마지막 주모 같은 여인이죠. '탁주파'들은 잘 알겠지만 대구시 중구 남산1동의 명물 탁주집 '도루묵'의 창업주입니다. 딱분 바르지 않아도 늘 새하얀 피부, 잡티 없는 표정, 기품있는 자태, 꼭 여느 문중의 종부를 연상시킵니다. 말간 몸짓으로 비가오나 눈이오나 연탄 화덕 옆에 앉아 안주용 도루묵을 구웠습니다. 단골 남정네들이 이런저런 흰소리를 해도 빙그레 웃음으로 뭉긋하게 받아 넘깁니다. 1961년 제일중학교 근처에서 움집 같은 막걸리집으로 시작해 올해 48년 역사를 가진 장수급 주막으로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저도 취재를 빙자해 그 집에서 몇번 술을 마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놋그릇에 담긴 잔 막걸리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보름만에 반들반들 닦아줘야 합니다. 안주라곤 콩나물과 깍두기가 전부입니다. 잔술 한 잔에 1천원. 그럼 꽁치 반 마리 혹은 자그마한 조기 한 마리가 번갈아 오릅니다. 모두들 한 가지 사연을 안고, 눅눅한 자세로 삐거덕거리는 의자에 앉아 가끔은 천장을 바라보다가 막걸리 한 모금 들이켭니다. 여기선 여자와 눈이 잘 맞지 않습니다. 사네끼리 눈이 잘 맞죠. 한잔이 만잔을 불러옵니다. 내일을 위해 밤 10시 문 닫으면 죽이 맞은 취객은 사이좋게 어깨동무 하고 남산동 다른 주점으로 휘청거리며 걸어갑니다.


◇…새로 이사간 도루묵집에 가봤더니

지난해 12월29일 낮12시 남산1동 골목.

햇살보다 응달의 힘이 더 셉니다.

도루묵 막걸리집 가는 골목, 좀 미적미적거립니다. 골목은 "뭐 그렇게 바쁠 것도 없다"고 대꾸합니다. 근처 옛 대구상고 자리는 센트로팰리스란 아파트촌으로 둔갑했지만 이 골목은 아직 60년대 소읍 정경입니다. 골목 전봇대 옆에 쌓아놓은 연탄재도 참 맛깔스러운 볼거리입니다. 행인들의 아랫도리는 마냥 후줄근하고, 아낙네들도 거의 움츠린 동선입니다. 훈훈하면서도 비애스럽죠.

문 열고 들어가니 퀭합니다. 술 손님이 전혀 없습니다. 예전 이맘때면 점심을 막걸리로 대신하려는 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누가 안방 문을 열고 나옵니다. 서씨 할매의 딸입니다.

"주모 할매는 안 보이네요?"

"몰랐어요, 지난해 5월13일 일흔 셋 나이로 돌아갔어예."

기자는 몇 년 간 그곳을 들르지 못했다. 서씨 할매가 늘 건강해 보여 최소 여든 이상을 사실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겉으로 보면 멀쩡한 것 같지만 실은 속골병 들어 있었어예."

"천년만년 살 것 같았는데, 결국 가셨군요."

"여러 군데서 우리 집 취재를 한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래 후미진 곳에 있는 집은 입소문만 해도 충분한데…."

4년전 30년간 지속됐던 예전 자리에서 현재 725-7번지로 이전했습니다. 50여 걸음 떨어진 데 있습니다. 예전 분위기가 '분청사기' 같다면 지금은 좀 번들거리는 '백자' 같습니다. 어라, 상호도 표준말로 변했네요. 도루묵, 예전에는 간판도 없었습니다. 유리창에 삐뚤삐뚤 페인트 체로 '도로메기 왕대포'를 흘리듯 적어뒀습니다.

서씨 할매는 이전 자리에서 너무 고생했는가 봅니다. 송판 주탁은 치우기가 힘들고 얼룩도 많이 남아 여간 불편하지 않았던 가 봅니다. 이사를 하면서 암갈색 라커칠 된 주탁 11개를 세팅했습니다. 도루묵 굽는 손뚜껑처럼 생긴 프라이팬은 예전 것 그대로 입니다. 한 쪽 벽에 언론에 비친 도루묵의 역사가 액자에 담겨 걸려져 있습니다. 상호는 '도로메기'가 좋아보였는데…. 서금란 할매 얼굴 사진도 간판에 부착돼 있습니다.


◇…혼자 와야 제격인 도루묵

희한하게 도루묵에는 둘이 오면 운치가 덜 납니다.

혼자와야 딱입니다. 그날도 제가 먼저 앉아 잔술을 시켰습니다. 꽃소금 한 접시에 콩나물 무침, 반쪽짜리 꽁치가 가세하네요. 조금 있으니 3명의 손님이 들었는데 모두 혼자였습니다. 웃음이 납니다. 48년 단골이라는 이모씨는 "다른 데는 혼자 앉아 술 마시면 청승스러운데 여기선 여럿 와서 술을 마시는게 더 청승궂구마"라면서 '도루묵 만세'를 외칩니다. 그래요, 이 정도 되면 도루묵은 문화재급입니다.

옆에 앉은 단골이 '날구지론'을 폅니다. "도루묵파는 날구지란 뜻을 압니다. 그걸 알아야 제대로 된 막걸리파지…, 날구지란 '궂은 날의 한잔'이란 방언입니다."

근처에 봉산문화의 거리, 봉산문회회관, 대구향교, 음향기기 골목 등이 있습니다. 한때 봉산거리에서 개인전 한 상당수 화백들은 지인들과 여기서 술잔을 부딪쳤습니다.

동원화랑 손동환, 서양화가 이원희, 이수동 등의 자취도 스며있습니다. 다른 예인들의 사랑방은 터주가 있지만 이곳에는 워낙 다양한 단골이 몰려들어 누가 자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오는 계층도 다양합니다. 걸어서 오는 사람, 자전거 몰고 오는 사람, 고급외제차 타고 오는 사람, 그래도 자리에 앉으면 모두 똑 같아보입니다. 앳돼 보이는 20대초반 여성부터 80대까지 충돌없이 왁지지껄 거릴 수 있습니다.

장사는 예전만 못하네요. 몇년새 다양한 버전의 추억의 막걸리집이 우후죽순 생겼났습니다. 또한 도루묵 근처에 주차난도 심하고 고령의 단골들이 와병중이거나 타계해 단골층이 홀쭉해졌습니다.

1970년대초만 해도 도루묵 한 접시가 100원, 이제 가격이 폭등, 국내산 도루묵 8마리가 7천원. 매월 첫 일요일만 놉니다. 낮12시 문을 열어 밤 10시에 문을 닫습니다. 젓가락 장단에 흘러간 노래 몇 소절?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한답니다. 주당 문인들, 거기서 신년 낮술 파티, 어때요? (053)422-0747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남산동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