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대구 '황제의 길' 을 다시 걷다

  • 입력 2009-01-08 07:43  |  수정 2009-01-08 07:43  |  발행일 2009-01-08 제3면
(대구驛∼북성로∼대안동∼달성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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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정체성 찾기 노력의 일환
학자·중구청 관계자 답사 나서
100년전 대구
일제시대 대구 북성로길. 이 길로 순종(얼굴사진)이 지나갔다.

1909년 1월7일 순종 대구 방문, 이토 히로부미·이완용도 수행

행재소인 경상감영에 여장 풀고 5일간 청도·마산을 방문했다

달성공원에도 들른 황제는 기념식수 후 기생공연 등을 관람 13일 오전 8시 서울로 돌아갔다

1909년 1월7일 목요일.

아침부터 대구거리는 붐비기 시작했다. 순검들의 기찰이 강화되고 여기저기서 들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무리지어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도시 전체가 뭔가에 홀린듯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햇살은 고양이솜털처럼 부드러웠으나 소매 속을 파고드는 바람은 제법 쌀쌀했고,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오후 3시24분 대구역.

흰 연기를 뿜으며 힘차게 달려온 열차가 기적 소리를 길게 울리며 서서히 멈춰 섰다. 기적 소리의 끝을 신호로 21발의 예포가 울리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융희(순종)황제가 상기된 얼굴로 차창 밖을 향해 두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인다. 그리고 트랩을 내려섰다. 황제가 대구 땅을 밟는 순간이다. 대구역사에 임시로 마련된 편전에 들어선 순종 황제는 박중양 대구군수 겸 경상도관찰사 등 대구지역 고위인사들의 인사를 받고는 가마에 올랐다.

봉영인원 4만명과 남녀학도 1천636명이 "성수만세"를 외치는 환호의 물결속으로 황제를 태운 뚜껑 없는 가마는 대구역을 서서히 빠져 나갔다. 기마병이 호위하는 가운데 순종황제는 일명 옥교라고하는 가마를 탔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완용 등 주요 각료들은 말을 탔으며, 나머지 수행원들은 걸어서 뒤를 따랐다. 대구역에서 행재소에 이르는 길에는 아치형 설치물이 세워져 있고, 흰색 모래가 깔린 어가길에는 각 학교 학생 및 시민들이 황제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오후 4시 순종황제는 대구 행재소(관찰도청-지금의 경상감영)에 도착, 대구 주요기관 및 유지를 접객했다. 이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내각총리대신인 이완용이 연설했다. 이어 오후 7시부터는 객사인 달성관(옛 경북인쇄소)에서 연합환영회가 열리고, 학생과 시민들은 대구시내에서 제등행렬을 벌였다.

달성관에서 첫날밤을 지낸 순종 황제는 다음날부터 5일간 청도와 마산을 들렀다. 12일 오전 11시45분 다시 대구역에 도착, 곧바로 달성공원에 들렀다. 달성공원은 1905년 대구의 일본인사회가 주도해 요배전이 건립되고, 1907년 3월 무렵 대구의 일본인들은 일부 조선인을 포함시켜 달성에 공원 조성을 목표로 달성공원기성회를 결성했다.

당시 순종 황제는 기념 식수를 한 뒤 신축 편전에서 한일 소학교 학생의 운동회와 기생 공연을 관람한 뒤 행재소(관찰도청)에 도착해 경기 및 충청, 전주, 경남북 7도 관찰사, 고령자, 효자 절부들을 접견했다. 다음날인 13일 오전 8시 대구역에서 서울로 향했다.

시간의 타임머신은 순종 황제가 대구를 찾은 지 100년을 훌쩍 뛰어넘은 2009년 1월7일 오후 2시 대구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3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100년 전 순종 황제 어가행렬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대구 중구청 관계자 등이 당시의 어가길을 다시 가보기 위해서.

이날 참석자들은 100년전 융희황제가 간 대구역에서 북성로를 거쳐 황제의 행재소인 경상감영과, 대구역에서 북성로, 대안동을 거쳐 달성공원에 이르는 길을 따라 이동했다. 이 길을 당시에는 어행길이라 불렀는데, 이른바 황제의 길이다. 비록 대한제국이 일제의 실질적인 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전국 순행이었지만, 이 길은 황제의 첫 대구방문 때 찾은 길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100년 전 황제의 대구방문 의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황제는 왜 100년전 대구를 찾았을까. 조선 500년 동안 왕들은 서울 도성을 10리 이상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왜 순종황제는 천리길을 달려왔는가.

자료에 의하면 1909년 신년 하례식 자리에서 이토가 순종황제의 전국 순행을 제안하고, 이완용과 협의를 거쳐 그 자리에서 순종황제의 재결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순종황제의 전국 순행 계획은 이토에 의해 갑자기 추진됐다.

일본 메이지 일왕이 일본 철도 부설후 일본 전국을 순회했듯이 순종황제에게 1909년 1월1일로 정식 개통된 경부선 철도 첫 시승행사를 이토 히로부미가 권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토는 황제로 등극한 지 2년밖에 안된 순종 황제를 데리고 다님으로써 일본제국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경부선철도 건설과 같은 일본의 대한제국 근대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나아가 탄압에도 불구하고 점점 거세져만 가는 의병운동을 잠재우려는 복합적인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답사의 의미

2009년 1월7일 이들은 왜 순종 어가길을 답사했는가. 순종황제의 어가길은 분명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임에는 틀림없다. 대구역에 모습을 드러낸 순종 황제는 전통적인 조선 왕조 임금의 복장이 아닌 일제의 의도에 의해 현대식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등이 수행하면서 더 이상 이 땅의, 이 나라의 임금이라는 위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구는 당시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만 1905년 순종의 명을 거역하고 대구읍성을 허문 이토의 양자 박중양이 경상도관찰사로 있던 곳이었다.

이런 치욕의 역사를 가진 어가길을 다시 찾고, 이를 연구하자는 것은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자는 반면교사로 삼기 위한 것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마냥 덮어두기보다는 이를 후세들이 철저히 각인해 다시는 나라잃는 치욕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 행사를 주관한 김재원 영남불교문화연구원 원장은 "치욕의 역사도 역사"라면서 "지난날의 아픔을 가슴깊이 새기며 대구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의 하나"라고 말했다.

100년전 대구
100년전 대구
대구 중구청과 영남불교문화연구원 관계자들이 7일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대구 순행 100주년을 맞아 어가길을 답사하는 행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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