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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실버세대들에겐 오후 한 때 고담준론을 나눌 수 있는 마을 정자 같은 대구시 중구 종로 2가 미도다방. 오후 4시가 넘으면 들끓던 손님이 일순간 사라진다. |
◇…정마담 대신 정여사라 불러주세요
신도, 대도, 동아, 서부, 부민, 달성, 시민, 미도….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변두리 영화관들, 대구시 중구 종로 2가에 가면 그런류의 다방 하나가 있습니다. 예, 미도(美都)다방입니다. 이름이 좀 촌스럽기도 하지만 연로한 분들의 엔도르핀을 파릇하게 다림질해줍니다. 워낙 상노인이 단골로 포진해있어, 일흔 넘어야 겨우 '새내기 노인'으로 취급받는 지역의 대표 실버다방이죠. 올해 106세이며 한국 최고의 스카우트 권영섭옹이 여기 나온다는 사실은 단연 화젯거리죠. 아직도 언행이 또렷하고 매주 월·목요일 중구 남산동 자택에서 걸어서 미도로 마실나옵니다. 권옹이 나오면 여든살이라도 깍듯이 예를 표합니다. 권옹은 자신을 안 속이고 여색을 멀리하는 게 장수비결이라고 토로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퇴임 후 미도다방을 들러 대구공고 동문들을 만났다고 하네요.
다방도 명물. 여주인 정인숙씨(58)는 더 유명합니다. 만나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녀의 맘씨 또한 '문화재급'입니다. 여느 다방 여주인이 아닙니다. 양장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오직 한복 차림인데 단골들도 절대 그녀를 마담이라 하지 않고 '정여사'로 예우합니다. 자극적이지도 요염하지 않은 뭉긋한 미소는 문종이에 묻은 햇살 같습니다. 그녀에겐 개성·캐릭터·폼·스타일이란 말보다 '자태(姿態)'나 '기품(氣品)'이 더 어울립니다.
한학자 밑에서 공맹(孔孟)의 문리를 터득했고, 지역 명문가 종택도 순례, 종가의 예의범절에 대한 안목도 넓혔습니다. 틈틈이 붓글씨도 체득했고 풀이가 쉽지 않은 묘갈명(墓碣名)까지 풀어준 적도 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어른 보살피는 게 체질이란 사실입니다. 연로한 분들을 집안 어른처럼 받들어왔다네요. 알고보니 그녀는 포은 정몽주의 얼이 서린 영일 정씨 가문의 7남매 중 장녀. 한때 빚보증 때문에 집안이 거덜났지만 낙심하지 않고 대구로 나와 다방을 꾸리면서 6남매의 생계를 책임졌답니다.
여기 커피값은 물가를 별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노인들의 호주머니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죠.
"요즘은 정말 경기가 안좋은 모양입니다. 예전 이맘때면 설 직후 두툼해진 호주머니를 자랑하는 어른들이 많았는데…."
커피 한 잔 1천500원, 약차 한 잔 2천원. 이렇게 받아 장사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몰래 어른을 위해 용돈·선물도 자주 챙깁니다. 누가 돌아가시면 문상까지 합니다. 평생 선비 기질로 살아온 어른들로선 정여사가 여간 특별해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5년전 그녀는 지역 사회단체인 보화원에서 주는 선행상을 받았고 상금도 거의 손님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2002년쯤 미도봉사회가 태어나고 지금 거기 부회장이 됐습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에서 서상돈 선생의 동상을 건립할 때 회원들과 함께 기금을 쾌척했고 어려운 학생을 위해 장학금도 마련해주고 있답니다.
◇…미도다방이 아니고 미도서당 같아요
미도는 돈만을 위하는 그렇고 그런 다방이 아닙니다. 미도서당·미도서원·미도정이라 해도 누가 뭐라지 않을, 흡사 대구향교의 부속시설 같습니다.
현재 자리로 오기까지 미도도 여러 곳곳을 방랑했습니다. 처음에는 경대교 근처 백림다방 시대를 열었습니다. 다음은 시청앞에서 우정다방, 1977년쯤 비로소 중앙파출소 옆 화방골목에서 기존 도가니 다방을 미도다방으로 바꿔 개업했습니다. 8년전 현재 자리로 이사 왔습니다. 초창기엔 청년들을 위한 음악 다방이었습니다. 그때 사용하던 LP음반 수천장이 그녀의 집에 소장돼 있습니다. 물론 손님층이 바뀌어도 옷은 항상 한복만 고집합니다. 저 한복이 미도를 지키는 '부적' 같습니다. 단골을 일일이 배려하는 후덕한 자태, 단번에 지역 선비들에게 소문이 납니다. 차츰 미도가 지역의 갑유(甲儒)급 선비들의 사랑방으로 격상됩니다.
특히 영남대 철학과 이완재 명예교수의 부친이자 대구의 선비로 대접받았던 이수락 어른(작고)이 자신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운 제자인 그녀를 위해 호를 지어줍니다. 바로 혜정(蕙晶)입니다. 다방 여주인으로선 드물게 한학자부터 아호를 받은 겁니다.
돌아가시기 며칠전까지 소주잔을 기울였던 목인 전상렬 시인도 혜정의 기품을 귀하게 여겼죠. 타계 5일전 혜정은 목인에게 용돈을 조금 드렸습니다. 목인은 그게 그렇게 좋았던지 '미도다방'이란 제목의 시를 신문에 발표합니다. 지금도 그 글귀가 다방 맞은편 벽 한 구석에 액자로 걸려 있는데 붓글씨를 쓴 사람은 바로 혜정입니다.
옆 골목에는 육국수 잘하는 진골목 식당이 있고, 건너편에는 대구의 첫 양옥집으로 불리는 정소아과로 들어가는 골목이 보입니다. 미도의 투박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면에 각종 서화 작품이 붙어 있어 꼭 고미술품 전용 갤러리 같은 기분이 듭니다.
카운터 옆에는 모필장(대구 무형문화재 15호) 이인훈씨가 기증한 작품이 걸려 있고, 군데군데 서화 20여점이 걸려 있습니다. 간혹 격이 낮은 걸 건네는 분들이 있으면 감히 걸지 못하고 자기 방에 귀하게 간직하겠다고 합니다. 매정하게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미도는 번개시장 같습니다. 의자가 110개쯤 됩니다. 점심 직후 2~3시간 반짝 붐비다가 일시에 사라집니다. 오후 4시쯤 되면 훤합니다. 꼭 연극 끝난 무대같달까요. 하루 평균 400여명이 찾고 이중 단골만 200여명.
혜정은 현재 대구 노인들의 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미도는 젊은이에게 이런 조언을 줍니다. "늙을수록 돈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많아도 그걸 사용하지 않으면 덜 가진 분보다 더 욕을 먹게 됩니다. 한 턱을 잘 내야 진짜 대우를 받는 게 노인입니다. 젊을 때 돈을 넉넉하게 벌어둬야 할 겁니다."
해마다 5월8일 어버이날과 12월 동짓날에는 정성들여 마련한 돼지고기와 떡, 팥죽 등을 할아버지들에게 대접합니다. 입춘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춘첩으로 인사를 나눕니다. 두 손으로 잡아야 하는 약차는 조그마한 국그릇 같습니다. 양쪽에 귀가 달려 있어 마시면 꼭 뽀뽀하는 것 같습니다. 참, 씁니다. 여느 집 약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10여가지 한약재가 정성스럽게 달여졌다는 걸 암시하듯 야생의 맛이 전해집니다. 그걸 알고 씁쓸해진 혀를 다스리는 전병류와 절편 생강이 고가의 문고리처럼 앉아 있네요. (053)252-2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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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한테 아호 받은 여주인 정인숙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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