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곰탕 삼국지(上) 소머리 곰탕

  • 입력 2010-02-05   |  발행일 2010-02-05 제43면   |  수정 2010-02-05
반가 곰국과 주막의 국밥이 합쳐진 일명 '장터탕'
곰탕은 고기 중심 반가 보양식
설렁탕은 사골 등 잡뼈가 중심
소머리 곰탕은 장터의 설렁탕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곰탕 삼국지(上) 소머리 곰탕
의성군 의성읍 의성전통시장 내 5일마다 개봉되는 소머리곰탕집 남선옥의 명물 가마솥에서 펄펄 끓고 있는 곰탕.

◇…한국 쇠고기 요리의 어제와 오늘

설밑에 '곰탕 삼국지'란 말을 우연히 떠올렸습니다.

EBS 요리비전에 몇번 출연한 적이 있는 저는 그 제작진이 설밑에 곰탕이란 주제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했고 저도 취재도 할 겸해서 기꺼이 동참했죠. 우린 식품사학계는 아직 곰탕과 설렁탕, 그리고 육개장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그렇게 치밀한 함수관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쇠고기를 갖고 끓일 수 있는 탕은 크게 설렁탕, 곰탕, 육개장 정도. 세 음식의 공통점은 식재료가 '소'라는 겁니다.

우리 선조들이 쇠고기를 식용으로 삼은 것은 역사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죠. 역사상 도살금지 기록은 너무도 자주 발견되는데 529년 신라, 599년 백제는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을 금합니다. 이때는 소와 말은 오로지 동력원으로 이용될 뿐 인도의 힌두교도처럼 '식용'으로는 언감생심이었죠. 식용 고기는 개와 닭에 국한됩니다.

고려조에 들어와선 988년 1·5·9월, 1066년에는 3년간 도살을 금하는 법령이 생기고 심지어 1403년에는 개와 매 사냥까지도 금해지죠. 1841년과 1854년 또 소 도살이 엄금됩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그 족쇄가 풀리고 덩달아 육식문화가 폭증하게 됩니다. 1910년 고기 수요가 늘어 도살된 소가 17만5천947두나 되죠.

예처럼 고려·조선조 쇠고기국이란 '화중지병(畵中之餠)'. 고려에 비해 조선에선 유림에서 제수용품으로 소와 돼지를 잡았고, 길흉사 등을 통해 겨우 동민들끼리 고기 한 점 맛볼 수 있었어요.

설렁탕과 곰탕과 달리 육개장의 원류는 비교적 쉽게 풀립니다.

육개장은 설렁탕과 곰탕에서 발원하지 않고 보신탕에서 발원합니다. 개고기 대용으로 쇠고기를 사용하면서 등장한 것으로 서울식과 경상도식으로 양분됩니다.

서울식에는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고 경상도식은 들어가는데 서울식은 벌겋지 않고 경상도식은 벌겋죠.

한말까지만 해도 서울 반가에선 맑은 쇠고기국을 원합니다. 뿌연 육수를 거부하고 고춧가루도 섞지 않습니다. 고춧가루가 국내에 들어온 건 임진왜란 이후. 벌건 육개장이 등장했다면 17세기 이후에나 가능하고,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가 벌겋게 된 육개장 스타일은 대구가 원조입니다. 대구의 육개장이 서울로 수출된 건 1920년대. 이를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설렁탕 & 곰탕

설렁탕은 비록 왕실의 친경행사에서 태생했지만 후에 장터로 나가'서민 버전'으로 발전해요.

한국에서 쇠고기를 갖고 만든 최초의 탕은 문헌상 설렁탕이란 게 학계의 통설.

조선 태조 때부터 동대문 밖 전농동(典農洞·현 동대문구 제기동) 선농단(先農壇)에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백성을 위한 '위민 퍼포먼스'를 벌이죠. 경칩 뒤 첫 해일(亥日)에 제를 지낸 뒤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입니다. 성종실록에는 성종 6년 원산대군과 재상 신숙주 등을 대동하고 선농단에 제사를 지낸 뒤 백성과 함께 음복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 행사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것으로 농사의 신인 신농(神農)을 모시는 제사로 선농·중농·후농제를 지냈지만 조선조 말에는 선농제만 남습니다. 왕이 친경하는 제도는 1909년(융희 3)을 마지막으로 폐지됩니다.

설렁탕은 일제 때 '설넝탕'으로 불렸어요. 양반들은 육수가 너무 뿌옇게 보여 직접 사먹지 않고 '설넝탕 배달부'를 통해 배달해 먹기도 했죠.

하지만 곰탕은 반가의 산물. 국물도 설렁탕보다 맑아요. 잡뼈가 많이 들어가지 않고 사골과 고기(양지고기와 사태살)만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에요. 양지머리와 사태만 삶으면 육수가 절대 뿌옇지 않고 뼈와 소양 등이 들어가야 국물이 흐려집니다.

탕(湯)은 그시절 '약(藥)'입니다.

특히 곰탕은 '곰국'이라고 해서 양반가에서 허약하거나 환자의 치유식으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설렁탕 본가는 1900년대초 생긴 서울 종로 이문 설렁탕이고, 서울 양반가 곰탕의 본가는 서울 명동의 하동관, 호남식 곰탕의 본가는 나주 하얀집, 그리고 설렁탕과 반가의 곰탕 형식이 장터에서 새로운 버전으로 꽃을 피운 게 의성읍 전통시장 내 남선옥과 경남 의령 군청 근처 종로식당 쯤이죠. 그런데 종로식당은 국과 탕의 경계에 있어요. 설렁·곰탕에는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지만 종로식당은 특이하게 고춧가루를 넣어 꼭 '콩나물육개장' 같아요.


◇…소머리 곰탕 3인방

여느 곰탕에는 잡스럽다고 해서 소머리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소머리와 사골과 소꼬리 중 어느 육수가 농밀할까요? 1등은 사골, 2등은 소꼬리, 3등은 소머리. 곰탕엔 사골, 설렁탕엔 소머리가 제격. 물론 갈비뼈, 등뼈, 엉덩이뼈 등 잡뼈류는 곰탕에 원칙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설렁탕에만 들어간다고 보면 됩니다만 지금 이 원칙은 다 깨져버렸죠. 하지만 의성 남선옥에서는 소머리만 사용하지만 소머리 갖고만 국물이 진해지지 않아 엉덩이와 허벅지뼈 등 온갖 잡뼈를 다 넣죠. 암소는 머리가 적어 황소를 사용하며 고기는 주로 소머리 부위의 살점을 썰어내고 이밖에 우랑(소 생식기), 수구레(가죽에서 벗겨낸 질긴 고기), 소 혀, 콩팥 등도 썰어줍니다. 수구레를 특히 강조하는 곳은 청도군 풍각읍 풍각시장 내 간판없는 풍각소머리 국밥집.

설렁탕은 '뼈의 미학'이 두드러진 메뉴입니다. 설렁탕에 담기는 대표 고기는 기름기가 거의 배제된 양지머리. 주인 기호에 따라 소양과 내장, 장기 부위를 넣어주기도 하죠. 지금은 고기를 더 강조하다 보니 점차 곰탕 스타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집단 소머리국밥촌으로 유명한 곳은 90년대 들어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나들목에서 불과 1㎞ 남짓 떨어진 곳에 형성된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소머리 국밥촌. 곤지암 소국밥 원조는 최미자씨가 경영한 소국밥집이고 코미디언 배연정씨 국밥집도 거기서 출발했죠. 남선옥 곰탕은 곤지암 스타일과는 사뭇 달라요. 곤지암은 국물은 사골로 내고 그 물에 소머리를 삶아낸 뒤 소 뼈는 버리고 18근 정도 나온다는 머릿고기를 썰어 국밥 형태로 넣어주지만 남선옥은 사골 대신 소머리 뼈를 매우 중시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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