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해외유학파 셰프를 찾아서-(4)](https://www.yeongnam.com/mnt/file/201012/20101210.010400811520001i1.jpg) |
솔레(Sole).
이탈리아 말로 '태양'이란 뜻. 이탈리아에서 만난 태양을 대구로 가져 온 오너셰프를 이번주에 만나봤다.
계명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파르마 아리고 보이토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뒤 이탈리아 파르마 국립극장에서 사랑의 묘약, 라보엠, 리골레토 등의 주역을 맡았던 테너 임제진. 꼭 'KFC 아저씨' 같았다. 둥그스럼하면서도 동공은 항상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음식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편안한 캐릭터였다. 그의 표정에서 기교가 아니라 성찰의 힘이 전해져왔다. 그는 지난 1~2일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대구발 토종오페라 '원이엄마'에도 출연했다. 스파르타 식으로 진행된 3개여월간의 연습 기간이 생애 가장 힘든 고비였다고 토로했다. 계명대 성서 캠퍼스 동문 맞은편 신당동 대학촌 초입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오 솔레'의 오너셰프인 그는 공연이 없을 때는 여느 조리사와 똑 같은 동선을 밟는다. 아침에 신선한 식재료를 위해 칠성시장으로 간다. 그리고 10시30분쯤 가게에 나와 요리를 한다. 그리고 연습장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가게로 돌아와 정산을 하고 밤 10시 집에 오면 그의 몸은 천근만근. '이게 인생인가, 테너의 길과 식당 사장으로서의 길은 과연 공존할 수 없단 말인가!' 그는 잠자기 전 이런 말을 여러 번 혼자 되뇌였다.
◇ 유학 전에는 돼지국밥에 매료 되었다
-유학 가기 전에 요리에 대해 좀 알았는가.
"1994년~2002년 이탈리아에 있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 페루자로 갔다. 거긴 한식당이 없어 중식당에서 밥을 해결했다. 사실 나는 유학 전 파스타가 뭔지 몰랐고, 돼지국밥 등에 매료돼 있었다. 토스카니니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베르디의 고향인 부세토로 가서 3개월 공부할 때 세 끼를 현지식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내 몸속에 이탈리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곧 파스타의 진미에 감전되고 나도 파스타를 직접 요리하게 된다. 하지만 오너셰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식당을 시작했는가.
"이탈리아에 있는 사부인 소프라노 사카르디가 4년전 대구에 왔다. 그가 대구에서 가장 괜찮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가고싶어 했다. 수성구의 한 식당을 엄선해 갔다. 그런데 홀서빙을 하는 종업원은 이탈리아 음식의 기본기도 모르고 있었고 심지어 특정 메뉴에 대한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습관적으로 음식을 서빙하고 있었다. 사부의 표정은 금세 굳어버렸다. 속으로 대구 음식 욕을 얼마나 할까 하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흐르더라. 본토의 메뉴와 자기가 하고 있는 메뉴가 정확하게 어떻게 다른 지를 알고 있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럴 바에야 내가 식당을 해보자는 오기 비슷한 기분이 나를 엄습했다. 솔직히 성악만 갖고는 밥벌이가 힘들었다. 그래서 내 노래를 위해 식당을 선택한 것이다."
-모교 근처에서 문을 열었는가.
"그렇지 않다. 4년전 경북대 북문 근처에서 문을 열었다. 현재 김천시향에 있는 첼리스트인 아내는 들안길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인 나폴리의 주인 조르주 아저씨한테 요리를 배웠다. 식당 이름은 지금과 같았다. 메뉴는 정통으로 갔다. 알리오 올리오 페페론치노, 노란자 들어간 카르보나라 등을 선보였다. 그런데 당시 손님 상당수는 소스가 걸쭉하게 들어간 미국식 파스타에 길들여져 있었다. 원래 파스타 재료가 이탈리아에서 오니 가격이 이탈리아에 비해 적어도 2배 정도 받아야 타산이 맞았다. 처음에는 9천900원선이었다. 학생들이 움직이지 않아서 7천원선으로 확 내렸다. 학생들의 빠듯한 호주머니 사정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었다."
◇ 홀에서 갈라 스타일의 오페라도 선보였다
-원래 성악가 출신이 식당을 열면 꼭 공연을 서비스 메뉴로 내미는 것 같더라.
"열정이 많은 시기라서 매월 갈라 스타일의 오페라 무대는 물론 각종 독창회와 앙상블, 심지어 마술쇼 등도 선보였다. 파스타 못지 않게 와인에도 치중을 했다. 그때 파스파를 취급하는 업소가 산책과 2~3곳밖에 안되어 경대 교수 등에게 나름대로 어필한 것 같았다. 시작할 때 자본금 2억원을 만들려고 대출도 받았다. "
-개업식은 안 했나.
"내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후배한테 연락을 일부러 안 했다. 몇몇 지인들이 섭섭해 하더라.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오고 싶어서 오는 식당이 되어야지 압력 넣어 오도록 하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그런데 왜 현재 자리로 이전을 했는가. 흥행에 실패했는가.
"일단 식당이 4층에 있었다. 당시 웬만한 식당은 1층이었다. 2층 이상은 모험이라는 걸 그때 처음 절감했다. 경북대 사회학과 천선영 교수 등이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주방에 들어갔는가.
"당시 나는 이탈리아에서 만난 친구와 아내에게 주방을 맡겼다. 나는 경영을 맡은 것이다. 계속해 적자였다.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 주방의 오일 연기 성대에 치명적인 영향
-그런 심정으로 무대에 서면 몰입이 잘 되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확실히 음악에 홀려 있는 것 같다. 아무리 힘들어도 무대에 서면 식당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두 가지 일을 겸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 파스타 고수처럼 처신하는데 알고 보면 이탈리아에 한번도 안 가본 사람들이다. 정말, 서울에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는 말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맞다. 본토를 이해 못하고 대구 스타일의 연장 선상에서 본토 메뉴를 곡해하는 게 대구의 수준인 것 같다. 본토를 이해하고 내 식으로 가면 괜찮겠는데 처음부터 퓨전으로 가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인 것 같다. 경대 근처에서 짬뽕 스타일의 파스타로 대박을 낸 집이 있다. 닭육수에 해물이 들어간 건데 살인적인 소스 맛이 식재료를 압도하고 있지만 요즘 학생들은 자기 입에 맞으면, 맛만 있으면 끝이다. 식재료의 원천을 따지지 않고 혀를 유혹하는 소스에 금방 포로가 되어버리는 것 같다. 이런 연장선상에서는 갈수록 강력한 소스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성서쪽으로 옮긴 이유는.
"지인이 현재 건물을 소개해주면서 동업을 하자고 했다. 1년전쯤인데 얼마간 경대점과 함께 경영하다가 지난 7월 문을 닫고 지금은 여기 한 곳에만 올인하고 있다. 대충해선 안되겠다고 생각해 본격적으로 주방일까지 맡았다. 현재 경대 근처 한 파스타 고수한테 한 수 배웠다. 요리는 아무리 잘 해도 늘 부족한 것 같다. 배우다가 끝날 것 같다."
-주방에 있으면 목이 갈 것 같은데.
"주방일은 성악가에게 치명적인 것 같다. 올리브 오일 연기가 목에 들어가면 금방 음성이 간다. 그래서 원이엄마 공연 때는 성대 보호를 위해 잠시 주방에서 나왔다."
-갈수록 식당을 치우고 싶다는 유혹에 노출될 것 같은데.
"물론이다. 하지만 내 음식을 보고 찾아오는 단골의 얼굴만 생각하면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접히더라."
◇ PS
가격 대비 식재료 값이 50%에 육박한다. 다른 집에서도 과연 이럴까 싶다. 그는 반드시 노래를 불러야 된다. 아마 한강 이남에서 성악가가 직접 오너셰프인 경우는 그가 유일한 것 같다. 부디, 식당과 성악 모두 대박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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