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은해사 운부암 보화루 바라지창을 통해 바라본 만추(晩秋)의 풍경. 창 속에 들어앉은 단풍이 꼭 두 폭의 수채화다. 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
“가을 나무가 많이 취했나봐요.”
“한잔 했는가 봐요. 봄에는 푸릇하더니만 벌써 여기까지 왔네요.”
“나뭇잎들도 나무와 이별하는 게 아쉬워 저렇게 여러 날 술추렴하는 거겠죠.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네요.”
“우리네 인생과 다를 바 없죠.”
“사는 게 재밌어요?”
“뭐, 그냥 그럭저럭이죠.”
“우리도 언젠가 죽겠죠.”
“죽을 때가 되면 죽겠죠. 모두 죽으니 딱히 억울할 것도 없고.”
“죽으면 우리 혼백은 어디로 갈까요?”
“몸이야 무덤 안으로 가겠지만 혼백은 글쎄…”
“괜한 말을 했죠. 아직 죽지 않았으니 더 의미있게 살아가는 법만 생각하면 되겠죠.”
“여든을 넘기니 실없는 미소가 잘 터져나와요.”
“왜요?”
“제가 지난 여름 한 일들을 다 알기 때문이죠.”
“그야 모든 인간이 다 같겠죠.”
“저는 신(神)을 믿지 않는데 신이 알면 크게 야단치시겠죠.”
“전지전능한 분이 유치하게 자길 믿는다고 좋아하고 안 믿는다고 야단치시려고요. 그러면 우리 인간과 똑같게요.”
“맞아요. 일리가 있네요. 그래도 신인데.”
“올해 나이가 몇이에요.”
“나이는 무슨, 자식도 떠나고 더 이상 곁에 꽃나비도 찾지 않는데.”
“산은 같은 산인데 저 단풍들은 제각기 표정이 다르네요.”
“저 단풍들은 서로를 치켜세우면서 함께 빛났다가 일제히 사라지지만 우린 아직 그렇지 못하죠. 단풍은 참 의연해요.”
“그렇죠. 인간은 남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다 자기 잘 되자고 일하죠.”
“동장군이 밀려오면 단풍은 무대에서 싹 사라지잖아요.”
“그 기상이 너무나 기특한 나머지 조물주가 이듬해 봄에 다시 부활시켜주는 거겠죠.”
“결국은 나무도 늙고 뿌리도 썩겠죠.”
“이 세상에는 영생하는 건 없어요.”
“날이 많이 차네요.”
“내일은 우리 서로 자리를 바꿔보죠.”
“재밌겠네요. 자리만 바꿔도 세상이 확 달라보이겠죠.”
“다음 세상에 오면 나는 돈 대신 문학을 붙들까 해요.”
“좋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죠. 물건은 사라지고 작품만 남는 것 같아요.”
“명함도 은퇴하면 무용지물이죠. 권세란 것도 다 그렇죠.”
“문학 속에서는 비극도 희극이고 희극도 비극이죠.”
“우리 삶도 그래야 할텐데….”
“재벌가 회장과 서울역 노숙자가 대중 목욕탕에서 만날 확률은 절대로 없겠죠.”
“정말 내세에서는 시인이 되어야겠어요. ㅎㅎㅎ”
이춘호기자 leekn@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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