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代째 가업… 문경 도공사촌들이 벌이는 ‘도예 삼국지’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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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4-27   |  발행일 2012-04-27 제34면   |  수정 2012-04-27
전통 망댕이가마 고집 공통점…남성미·청순미·질박미 ‘3人3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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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자 8대 종손 김영식의 할아버지 고 김교수 명장.
일본말로 ‘시니세(老 )’란 대대로 이어 온 전통·격식·신용이 있는 오래된 점포나 조상의 가업을 이어받아 지키는 일을 말한다. 일본은 1천년이 넘는 시니세가 7개나 있고, 500년이 넘는 시니세만도 707개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통가업을 계승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일제강점기, 6·25전쟁, 급격한 산업화과정을 거치면서 많이 줄어들었다. 권력과 자본을 승계하는 경우와 전통가업과 기술을 계승하는 차이는 뭘까. 우리는 전자에 대해선 날 선 비판을 하고 후자에 대해선 후한 평가를 내린다.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206-1번지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사기가마가 있다. 이 가마는 조선 헌종(1843)때 만든 것으로 내년이면 나이가 딱 170년이다. 일명 망댕이 가마로 불리는 이 가마는 2006년 경북도민속자료 제135호로 지정됐다.

이 가마는 현 소유자인 김영식 도공(43)의 5대조 김영수 선생이 만들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 사기장(沙器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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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가장 오래된(170년) 전통 사기가마인 망댕이 가마. 현 소유자는 김영식 도공이다.

계의 역사는 영식씨의 7대조 김취정 선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어 광표·영수·낙집·운희·교수로 이어져 당대에 이르고 있다. 김교수 선생은 정화(천만)·정문(복만)·정옥(인만) 3형제를 낳았다. 셋 다 도공이었다. 작고한 정화의 맏아들 영식씨는 도예가문의 종갓집으로 ‘조선요’를 운영하며 8대째 가업을 계승하고 있다. 또 작고한 정문의 다섯째 아들 선식씨(41) 역시 ‘관음요’를 개설해 8대째 가업 을 잇고 있다. 한편 정옥(71·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의 장남 경식씨(45) 역시 부친과 함께 ‘영남요’를 경영하고 있는 8대 도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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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댕이. 진흙덩어리며 한쪽은 굵고 한 쪽은 가늘다.
옛날에는 사기 짓는 일을 팔천(八賤)이라 하며 천한 일로 업신여겼으나, 지금은 ‘전통을 지키는 예술가’로 대접 받는 시대가 됐다는 점도 도공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계기가 될 수 있다.

3인은 모두 250여년 역사를 가진 8대 도예가문의 4촌간으로 40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전통 망댕이 가마를 이용하는 등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비법을 대물림해 작품을 만들어오고 있다. 선의의 경쟁을 하며 8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이들의 삶과 작품, 그리고 예술관에 대

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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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자 8대 종손 문산(聞山) 김영식이 망댕이 가마 안에서 백자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조선요’ 운영 종손 김영식


“도자기를 만드는 데 있어 완성은 없습니다. 집념과 끈기의 연속이지요. 죽으나 사나 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꿋꿋하게 지켜 후대에 물려줄 생각입니다.”

문경읍 마성면 관음리 하늘재 아래에서 21년째 조선요(窯)를 운영하고 있는 문산 김영식(43)의 말이다. 그는 59세에 작고한 7대 도공 김천만 선생의 장남으로,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남다르다. 4년 전에는 함께 일하던 동생 운산 김윤식(39)이 독립을 해 인근에서 남양요를 운영하고 있다.

문산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삼촌이 일하는 가마터에서 심부름과 허드렛일을 하며 기술을 배웠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군대생활을 제외하고 문경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망댕이 가마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도 그의 임무다. 망댕이 가마는 고유의 전통 가마다. 길이 25㎝, 지름 13㎝ 정도로 뭉친 아령을 닮은 진흙덩어리로 한쪽은 굵고 한쪽은 가늘다. 이것을 이글루와 같이 만들어 6칸으로 길게 이었다. 망댕이 가마는 벽돌 가마와 달리 1천℃ 이상의 고열에도 너끈히 견딜 수 있을 만큼 단열효과가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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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 김영식의 나비문양.


국내最古 ‘망댕이’ 보유
건배용 잔 청와대 납품도
박물관 등 도요관광지化

170년 된 가마터 옆에는 유약 원료인 차돌이나 장석을 빻는 디딜방아가 있다. 2년 전에는 초가로 만든 살림집과 옛 작업장도 복원됐다.

기자가 조선요를 방문한 지난 20일, 그는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으로 조선요 불가마 안에서 그릇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가마 옆에는 초벌구이를 한 도자기가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그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불구덩이도 겁내지 않을 만큼 용맹성과 과단성이 있다.

“강한 체력과 정신력이 있어야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잠시라도 가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문산은 2001년부터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을 비롯해 각종 대회에 입상하고 일본에서 전시회도 가졌다. 2010년에는 청와대로부터 건배용 잔을 주문받아 납품해 특허를 받았다.

그릇은 장인(匠人)의 성격을 반영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듯 그의 청화백자 작품은 남성답고 호방한 기운이 넘친다. 마치 말을 탄 고구려기마무사의 기상을 보는 듯하다. 그는 주로 다완이나 다기, 항아리를 만들지만 밥·국그릇 같은 생활자기도 만든다. 그는 그릇에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나비문양을 주로 새긴다.

최근에는 그의 자택 옆에 전액사비로 건립한 망댕이요박물관(가칭)을 완공하는 데 온 정성을 쏟고 있다. 박물관 안에는 선조들의 유품과 작품, 각종 사진 자료를 포함해 자신의 작품도 전시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120여점의 작품을 모았다. 우리말은 물론 영어와 일어로도 전시품을 소개할 생각이다. 내부 공사를 제외하고 80% 이상 완공된 박물관은 총 330여㎡(105평) 규모로 아름다운 전통한옥의 멋을 뽐내고 있다.

“인근 하늘재와 망댕이 가마터, 박물관을 연결하면 세계적인 도요관광지가 될 수 있지요. 올 가을 망댕이요박물관이 준공되면 우리 가문과 망댕이요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는 현재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 중 원하는 아들에게 가업을 잇게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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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도공 미산(彌山) 김선식이 자신이 만든 관음댓잎항아리를 살펴보고 있다.

◆‘관음요’ 운영 김선식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용흥초등학교 뒤편. 아름드리 노송 여섯 그루가 가지를 길게 뻗치고 있는 가운데 나지막한 황토집과 망댕이가마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은 7대 도공 김복만 선생의 막내아들 미산 김선식(41)이 8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관음요다.

“어릴 때 형제자매 8명이 단칸방에서 같이 생활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선친께서는 소싯적 할아버지로부터 도자기 굽는 기술을 배웠지만 37세 때 정식으로 도예를 시작했지요. 아버지 형제 중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했지만 피를 속이지 못하고 낙향해 도공이 됐습니다. 선친은 돈 버는 재주가 없었지요. 전형적인 ‘예술가스타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의 작품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위대했습니다. 선친께서는 또 지역의 문화운동가이셨고 교육자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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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 김선식의 변형된 포도문양.
관음댓잎다기 특허 등록
건조기 개발로 신지식인
스님고객 많고 후진양성

미산은 나긋하고 조용한 말투로 선친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초·중등학교에 다닐 때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수재였으나 가난으로 경북기계공고에 들어갔다. 고등학교에서도 3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졸업 후 삼성반도체에 취업해 1년여간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위복무차 고향에 내려왔다 부모님이 힘들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직장생활을 접었다. 아버지는 처음 그의 도예입문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흙 만지기를 좋아한 그의 소망이 이뤄진 것이다. 1991년 미산은 결국 정식으로 도예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역시 편안한 가스 가마 대신 집안내력으로 전해오는 전통 망댕이 가마를 고집하고 있다.

“좋은 흙과 나무 등 양질의 원료를 사용해야 제대로 된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만드는 기술이 20% 정도라면 흙·장작·불이 나머지를 차지합니다. 특히 장작이 중요한데 저는 도끼로 팬 한국산 적송만 사용합니다. 10년 후에 쓸 것까지도 미리 준비해놓았지요. 제대로 말려야 화력이 좋습니다.”

미산은 문경의 도예대가로부터 인정받는 실력파 중의 한 명이다. 30대 때는 24시간 내내 잠을 자지 않고 그릇 굽는데만 열중하기도 했다. 분청사기와 청화백자를 주로 만들던 그는 2006년 붉은색 유약을 입힌 ‘경면진사(鏡面辰砂)’라는 작품과 울퉁불퉁한 댓잎모양의 형태를 지닌 관음댓잎다기를 처음으로 만들어 특허청에 등록했다. 또한 나무 건조기를 개발해 그해 행자부로부터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미산은 2006년 영남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지난해 현대미술대전 공예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국내외 전시도 수차례나 했다. 미산의 작품에는 그의 얼굴과 이름처럼 맑고 선(善)한 기운이 감돈다. 그래서인지 미산의 고객은 주로 스님들이다. 지난해에는 자선바자회에 작품을 출품해 3천만원을 복지시설에 기부할 만큼 선행도 남다르다.

그는 선친이 즐겨 사용하던 변형된 포도문양을 도자기에 그린다. 선친처럼 미산 역시 그림과 다도에 조예가 깊다. 미산은 젊은 나이임에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따르는 제자가 많은 것도 복이다. 벌써 5명의 제자가 독립해 요장(窯場)을 운영하고 있다.

미산은 “도자기는 농사와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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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명장 백산 김정옥의 장남인 8대 도공 우남(牛湳) 김경식이 물레를 돌리며 작품을 만들고 있다.
◆‘영남요’ 운영 김경식

문경시 문경읍 진안리에 위치한 영남요.

도예명장 7대 도공 백산(白山) 김정옥(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과 이수자인 그의 아들 우남(牛湳) 김경식(45)이 함께 운영하는 요장(窯場)이다.

지난 21일 우남은 물레질로 항아리의 굽깎기에 열중하며 문경 전통찻사발축제에 내놓을 작품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남은 백산의 1남4녀 중 맏이로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있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한국도예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장남 지훈(17)을 포함하면 9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셈이다.
그는 영진전문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다시 3사관학교에 들어가 임관 후 대위로 전역했다. 7년간 장교생활을 마친 뒤 1995년 늦깎이로 도예에 입문해 17년째 영남요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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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김경식의 포도문양.
도예명장 김정옥의 장남
조선사기장 명맥 이어가
달항아리로 신지식인에

“그릇을 만드는 데도 타고난 재능이 있으면 수월합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과 집념, 끈기가 없다면 일가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날씨와 온도, 습도 역시 중요합니다. 거기에다 도공의 컨디션도 중요한 변수입니다. 보통 완성된 그릇 중 절반은 버린다고 보면 됩니다.”

우남은 그의 아호처럼 우직한 소를 닮았다.

“입문한 지 3년간 집밖 출입을 하지 않을 정도로 그릇에만 매달렸습니다.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선 성형은 말할 것도 없고, 회화·조각·조형 등 모든 면에서 숙련된 기능을 필요로 합니다. 다기나 다완 같이 작은 그릇을 만들고 나서 다시 항아리와 같은 큰 그릇에 도전했습니다. 10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남은 사기장인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조선사기장의 명맥을 이어가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길지 않은 경력임에도 전승공예대전을 비롯해 각종 기능경기대회, 전람회 등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006년에는 달항아리 제작 기법을 개발해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친환경소재 개발에도 힘을 써 ‘황자유약’특허를 받았다.

지난해에는 문경찻사발축제 때 열린 전통 발물레경진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 캐나다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우남은 여러 작가의 다완을 섞어 놓았을 때 백산의 작품을 금방 식별할 수 있다. 다완에 나타나는 선의 굵기와 깊이가 도공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우남의 꿈은 백산의 기술을 오롯이 전수해 이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이다.

그가 만드는 그릇은 다완이나 다기, 항아리 등이 대부분이지만 밥·국그릇도 만든다. 그가 그릇에 새기는 문양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포도문양이다. 포도송이 같이 복이 주렁주렁 달리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다.

그가 만드는 다완은 화려하기보다 질박한 미를 담고 있다. 색깔은 순백이 아니라 은은한 푸른빛을 띤다. 이는 민요(民窯)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흙은 문경지역의 사토에다 산청, 진주 등지에서 나오는 고령토를 적절한 비율로 섞는다. 우남 역시 가스 가마보다 장인의 혼과 정성이 담긴 전통 망댕이 가마를 고집하고 있다. 최근 30년간 사용하던 가마 대신 새 망댕이 가마를 설비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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