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태백산 사고를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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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8-26 07:57  |  수정 2014-08-26 07:57  |  발행일 2014-08-26 제22면
[문화산책] 태백산 사고를 오르다

234년 전인 1780년 음력 8월, 무더운 더위에도 불구하고 선비 박종은 각화사의 젊은 승려와 함께 태백산 사고(史庫)에 올랐다. 청량산 유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왕조실록이 보관되어 있는 봉화의 태백산사고를 찾은 것이다. ‘돌계단이 비늘처럼 이어져 공중에 매달려 있는 듯한 길’을 따라 10여리를 올랐다. 박종은 그 끝에서 여러 색깔과 무늬로 꾸민 높고 큰 건물을 만날 수 있었는데, 하늘 위의 12누대 같았다.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어서 이곳 책임자인 참봉은 자리나 짜고 있었지만, 이 고요 속에서 조선왕조실록은 그렇게 보존되고 있었다.

조선은 역사적 평가를 통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려고, 왕을 비롯한 정치의 모든 일상을 철저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은 왕이 승하한 이후 ‘실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고, 행여 있을 유실에 대비해 전국 최고 오지에 지은 사고에 그것을 나누어 보관했다. 전북 무주의 적상산사고와 강화도의 정족산사고, 강원도의 오대산사고, 그리고 봉화의 태백산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궁궐 밖에 있는 4개의 사고라고 해서, 4대 외사고 또는 4대 사고로 불렸다.

조선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록열을 가진 나라였다. 그 기록열은 기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열정으로도 이어졌다. 기록의 중요성만큼 보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그것을 후대가 보고 판단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보존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왕조의 이 같은 기록과 보존의 열기는 개인에게도 이어져 인구 대비 가장 많은 기록유산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조선의 4대 사고는 이 같은 조선의 기록과 보존의 열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최근 필자는 선비 박종이 올랐던 길을 따라 터만 남은 태백산 사고지를 올랐다. 각화사의 스님 한 분이 산꼭대기를 가리키면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그 끝에서 사고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험준한 길을 오르면서, 왜 여기가 사고지로 선택되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실록을 보존하기 위한 그들의 의지였음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편하게 보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이 길을 따라 실록 보존을 위해 노력해왔던 많은 사람들이 남긴 땀의 결정체인 것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디지털국학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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