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초 104대 1 뚫고 입사…그땐 가수들이 PD보다 DJ에게 더 굽신”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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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17   |  발행일 2014-10-17 제35면   |  수정 2014-10-17
● FM 음악프로 DJ 31년
대구MBC 이대희씨
20141017
대구MBC FM 최장수 DJ로 1983년 10월10일부터 현재까지 음악방송을 이어가고 있다. 매일 오전 11시 ‘이대희의 골든디스크’를 진행하고 있다. 추억의 뮤직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그를 위해 지역 애청자들이 ‘골디 팬클럽’도 결성했다.

DJ(Disk Jockey).

한때 ‘젊은이의 우상’이었다. 라디오 시절의 대표적 ‘문화아이콘’이었다.

DJ의 역사는 재미있는 일화로 시작된다.

미국 한 방송사에서 어느 밴드의 공연을 중계하려고 했다가 공연이 취소되자, 그 방송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 밴드의 음반을 틀면서 마치 현장 중계하듯이 방송했다. 그걸 본뜬 미국 뉴욕 WNEW 방송사의 ‘마틴 블록’이 진행하는 ‘메이크 빌리브 볼룸(Make Believe Ballroom)’을 통해 처음 DJ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시작됐다. 그게 1935년 일이니까, 오늘날의 방송 DJ 프로그램은 8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셈.

1964년 10월5일 동아방송(DBS)이 기념비적인 방송을 내보낸다.

챈테이스(Chantays) 악단의 ‘파이프 라인(Pipe line)’을 배경음악으로 ‘젊음의 푸른 꿈과 낭만을 안고 달려보는 리듬의 퍼레이드, 오늘의 오프닝 넘버는…’으로 오프닝 멘트를 날렸던 최동욱의 ‘탑튠쇼’. 이 코너의 진행자 최동욱은 한국 1호 DJ로 기록된다. 이게 대박을 내자 1년6개월 뒤 MBC가 이종환을 스카우트해 ‘탑튠 퍼레이드’로 응수한다. 이후 불멸의 DJ라인이 이어진다. 박원웅은 71년 11월부터 MBC에서 ‘박원웅과 함께’, 81년부터는 이종환이 MBC에서 ‘밤의 디스크쇼’를 발진시킨다. 이 밖에 한인용, 김기덕, 김광한 등도 한 시절을 풍미한다.


방송DJ 전성시대
대구 자타공인 음악도시
FM 고음질방송 열리자
DJ 주가 하늘로 치솟아
공채엔 전국DJ 몰려들어
팬 선물세례 ‘행복 비명’
엽서도 하루 4천장 쇄도

DJ시대의 침몰
워크맨·CD·노래방 영향
‘나만의 음악시대’로 변화
DJ 대신 달변의 MC 득세
음악 자리에 말재주 점령

◆대구 DJ 역사

대구 DJ 역사의 디딤돌 구실을 한 추억의 FM방송국이 있었다.

바로 71년 4월25일 제7대 대통령선거를 이틀 앞두고 전격적으로 개국한 bbc FM이다. 당시 bbc 개국은 군부독재 정권이 젊은이의 이목을 FM방송에 묶어두기 위한 고도의 정략이었다. bbc는 서울과 부산에 이어 전국에서 셋째 FM 방송국. 그 방송국 최고의 DJ는 ‘대구 DJ 1호’로 불리는 김진규(68)였다. 그는 옛 한일극장 맞은편 골목에 있던 지역 첫 DJ 직영 음악다방 ‘스카보로 페어’의 최강 DJ. 그는 영주 출신으로 경북대 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영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60년대 후반에는 음악감상실 녹향에서 잠시 머무른다. 그는 전강문(전 대구DJ협회장), 도병찬 등과 함께 bbc로 입성한다. 사옥은 대구 중구 동성로 옛 런던제과 빌딩 3층에 있다가 76년 법원 옆 수강빌딩으로 이전했다가 80년 KBS에 통합된다. KBS대구방송총국의 최고 인기 DJ는 78년 1월 방송국에 들어간 뒤 96년까지 추억의 팝송, 팝스팝스, 7시의 데이트를 진행했던 김병규씨. 현재 평일에는 포항교통방송에서 밤 10시 김병규의 ‘낭만이 있는 곳에’, 주말에는 대구교통방송에서 오전 9시부터 ‘더 라디오’를 진행한다. 김진규씨가 그의 친형.



◆공채 DJ 시대를 연 골든디스크의 이대희

83년 10월10일.

대구 MBC FM에 공채 DJ들이 등장한다. 그날부터 31년째 쉬지 않고 방송을 하고 있는 장수 DJ가 한 명 있다. 매일 오전 11시 ‘이대희의 골든디스크’(95.3 ㎒)를 진행하는 이대희씨(57). 최동욱의 타이틀에서 따온 ‘탑튠 퍼레이드’로 시작해서 ‘팝스 퍼레이드’ ‘4시의 다이얼’ ‘이대희의 음악캠프’를 거쳐 97년 3월부터 지금까지는 ‘골든디스크’를 진행하고 있다. 14년 전 DJ로는 드물게 ‘팬클럽’도 결성됐다.

그를 만나 대구 DJ문화의 뒤안길을 더듬어 봤다.



-83년 대구MBC FM이 태동하던 시절 대구의 음악문화는 어땠나.

“당시 대구는 전국 최강의 음악도시였다. 코리아, 해오라기, 무아, 포그니, 행복의 섬, 에뜨랑제, 빅토리아 등을 비롯해 고색창연했던 클래식 전용관 녹향과 하이마트, 통기타 위주의 대형 분식점과 통기타 카페도 있었다. 실력파 DJ도 오디션을 봐야 진행을 할 수 있었다.”

-다운타운 DJ 시대가 곧 방송국 DJ 시대로 건너간 것 같다.

“KBS와 MBC FM이 개국하면서 83년부터 다운타운의 DJ 시대도 서서히 추락한다. 인기 DJ가 방송으로 진출하고, FM 방송이 고음질의 하이파이 스테레오 방송을 시작하면서 구태여 감상실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다운타운의 열기가 사라지자 방송국 DJ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가수들은 PD보다 DJ에게 더 굽신거려야만 했다.”

-기억에 남는 가수가 많겠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20장이 넘는 LP를 옆에 끼고 오던 가수의 노래를 들어주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가 바로 조덕배였다. 특히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깡소주 2병을 비우던 갑장 김현식, 동아쇼핑 비둘기 홀에서 만나 염매시장 좌판에서 소주를 같이 마시던 (故)고 김광석, 대구에 내려와 따로국밥을 먹으며 ‘수성못이 아니라 수성호수로 개발해야 한다’고 말씀하던 고 이종환 선배님 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최고의 전시로 발돋움한 예쁜 엽서전

-선물공세도 엄청났겠다.

“깨알 같은 글씨에 알록달록 꾸민 엽서를 보내오던 어느 소녀, 아버지의 소중한 유물이었던 녹음테이프를 전해주던 딸, 추운 겨울바람에도 손수 짠 목도리를 전해주기 위해 정문 밖에서 기다리던 맘씨 예쁜 아가씨, 농사지은 고구마를 소포로 보내준 아저씨, 아들 생각에 보낸다고 손수 달인 한방차를 정문 수위실에 맡겨두던 할머니…. 지금 그분들은 모두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하다. 모두 나의 오늘을 있게 해준 고마운 분이다.”

-예쁜 엽서전도 인기 행사였던 것 같다.

“84년 7월1일~9월20일 엽서 접수상황을 조사한 결과 ‘정오의 희망곡’에 무려 1만4천238장의 엽서가 몰렸다. 프로그램 한 편당 평균 3천~4천장. 하루에 채택되는 건 고작 8~10장. 아까운 엽서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개국 1주년 때 대구백화점 특별전시장에서 예쁜엽서전을 열었다. 89년에는 지방 순회전도 가졌다.”

-어떻게 해서 DJ가 됐나.

“83년 10월10일 공채 1기 DJ로 들어왔다. 공채로 DJ를 뽑는 건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다. 대다수 방송국에선 특채를 선호했다. 전국에서 기라성 같은 DJ가 몰려들었다. 경쟁률은 104대 1. 그 무렵 난 대구 서구 평리동 네거리 쪽에 있던 삼우무역 직원이었다. 어느 날 남산동 국밥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공채 광고를 듣게 된다. 순간 감전됐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를 절감한다. 12명이 3차 오디오 테스트를 통과했다. 마지막 관문은 연수코스. 최종합격자는 나와 한인규, 김학용, 김정년, 이성원, 이순령, 유은화 등 7명이었다. 이성원은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성산포’란 시낭송 녹음 테이프로 80년대초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상당수 다운타운 DJ는 우수수 낙방이었다. 신파조 멘트가 방송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국초 음반도 미비했던 FM 레코드실

-FM 개국 초기의 분위기는 어땠나.

“개국 하루 전에 미얀마 아웅산 묘역에서 테러사건이 터졌다. 잔칫집이 졸지에 ‘초상집’으로 돌변했다. 사흘간 애도방송이 나갔다. 문제는 음반이었다. 지역에선 음반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2인1조로 서울로 올라가 음반을 구해 내려왔다. 83년 1월 레코드실에는 모두 2천354장의 음반밖에 없었다. 개국초기에는 정규 방송 프로그램이 없고 서울과 부산 MBC에서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오후 8~9시에는 당시 서울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던 박원웅이 직접 대구로 내려와 전화 희망곡을 중심으로 ‘FM 청취자와 함께’를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이젠 지역 방송가에도 전문 DJ는 전무한 것 같다.

“MBC에는 나 혼자뿐이고, 대구교통방송에는 김병규와 김윤동씨가 포진해 있는 정도이다. 다운타운 음악다방은 전몰이다. 설 곳이 없고 돈벌 곳이 없으니 자연도태되고 있다. 추억 다방도 추억을 빙자한 음악다방 형태일 뿐이다. ”

-갑자기 DJ 시대가 왜 침몰한 건가.

“80년대초 워크맨과 88년 CD 출시, 91년 노래방 등장으로 점차 쇠퇴돼 간다. 그야말로 ‘마이마이(My My) 뮤직시대’가 된 것이다. 이때 DJ가 아닌 ‘달변의 MC’들이 득세를 한다. 인기 가수나 개그맨, 탤런트가 상업적 행위 수단으로 방송시간을 차지했다. 음악이 아닌 말재간에 귀가 쏠렸다. 지금 대부분의 방송이 DJ와 MC를 혼돈하고 있다.”

-DJ는 뭔가.

“DJ 시스템이란 DJ가 프로그램 제작의 전반적인 권한을 갖고 전 과정을 담당하며, 결과에 책임지는 것이다. ‘오우펨(AWPEM)’이란 다섯 가지 기술 즉, 아나운서(Announcer), 원고작성(Writer), 프로듀서(Producer), 에디터(Editor), 사운드 엔지니어를 뜻하는 믹서(Mixer)의 복합적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진행하는 음악 프로그램의 포맷을 ‘DJ 프로그램’이라고 부른다. 현행 프로그램에서 과연 진정한 DJ가 몇이나 있을까? 작가의 원고를 들고 PD의 기획과 연출을 따른다면 분명 DJ가 아닌 MC다.”

-앞으로 계획은?

“정말 옛날식 음악다방 같은 분위기의 LP 음악실을 열고 싶은 게 소망이다. 영상음악과 실연(Live)이 한무대에 올려지는 ‘팝음악 감상회’도 열고 싶다. 정기 착한공연을 기획하기 위해 실속없는 ‘골든파크’란 기획사도 만들었다. 오는 24일 왜관역 광장에서 열리는 칠곡군 장애인 가요제 준비로 정말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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