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 길을 걷다] 곡성 세계 장미 축제 트레킹

  • 김찬일
  • |
  • 입력 2025-07-03 19:12  |  발행일 2025-07-03
전남 곡성 세계장미축제장의 풍경. 1천4종 수백만 송이 장미가 핀다.

전남 곡성 세계장미축제장의 풍경. 1천4종 수백만 송이 장미가 핀다.

5월은 장미의 달이다. 장미로 물드는 하루, 전남 곡성 세계장미축제장은 1천4종, 수백만 송이 장미가 5월의 여왕으로 피어 있다. 매표소를 지나자 활짝 핀 장미들이 짙은 향기를 뿜어내며 유혹을 한다. 축제장은 관광객과 장미가 넝쿨식물처럼 엉겨 분답기 짝이 없다. 게다가 먹거리까지 대열에 끼이면 신이 나고 흥겨움에 어깨춤이 절로 난다. 꽃 중의 꽃이라는 장미, 어떤 재배 역사가 있을까.


고대 중국,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종의 장미를 재배한 벽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기원전 약 1900년 전후로 건축된 크레타섬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하면서 최초의 장미 벽화가 발견되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에 장미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장미 향수, 장미 목욕 등 많은 장미를 생활에 이용하였다. 그녀는 연인 안토니우스를 만날 때 수많은 장미를 사용, 그가 장미로 인해 그녀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사랑하도록 둘만의 거처를 장미로 가득 채우곤 했다. 중세에는 영국에 장미 전쟁이 있었다. 1455년에서 1487년까지 영국의 왕권 다툼으로 인한 랭카스터 가문(붉은 장미)과 요크 가문(흰 장미)의 전쟁이었다.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헨리 7세)가 승리하면서 장미 전쟁은 끝나고, 그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며 두 가문의 상징(붉은 장미와 흰 장미)을 통합한 튜더 로즈를 내세워 튜더 왕조를 열었다. 왕관을 향한 전쟁이었다.


장미축제장을 달리는 미니 열차. 선로 옆으로 장미가 활짝 펴 있다.

장미축제장을 달리는 미니 열차. 선로 옆으로 장미가 활짝 펴 있다.

근대에는 많은 장미의 시를 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묘비명에 "오 장미, 순수한 모순의 꽃, 겹겹이 눈꺼풀처럼 쌓인 꽃잎 아래,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을 자는 즐거움"이 적혀 있다.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여행, 거기에 밤에도 지지 않는 장미가 있고, 영생의 잠을 자는 즐거움이 있다. 중앙화단을 지나자 풍차가 보인다. 돌지 않는 풍차, 고흐의 몽마르트의 풍차. 알퐁스 도테의 풍차 방앗간에서 온 편지가 내가 걸어온 만큼 더 멀리서 마음에 아려온다. 잡을 만하면 사라지는 것들. 섬과 별, 꽃과 꿈. 오래 전부터 내 안에서 수시로 돌아가던 그 바람개비들이 오늘은 멈추어 섰다. 풍차가 돌지 않기 때문에. 그 옆 상수리나무 길을 걷는다. 녹색 넓은 잎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우듬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가뭇없다. 활엽수 그늘은 막무가내 길을 터준다. 9월이면 도토리가 주렁주렁 달리는 상수리나무 아래 그 길은 우리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세계테마정원을 지나면 나오는 기차 플랫폼. 승객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세계테마정원을 지나면 나오는 기차 플랫폼. 승객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세계테마정원을 지나 기차 플랫폼에 간다.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어딘가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탄다면. 이제 그대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리란 걸 안다. 기억의 푸른 이끼를 이고 선 간이역. 그렇게 떠난 사람들이 남긴 입김과 아쉬운 그리움들. 이름 없이 피었다 지는 들꽃 같은 사람들의 흔적이 남긴 언어들. 그 의미가 간이역의 기적소리가 된다. 기적소리는 무지개보다 더 가슴을 뛰게 한다. 기차를 타고 떠나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 피를 팔아 장사 밑천을 하였던 동네 선배 수철이 형. 가난 때문에 중동에 막일 간 어깨동무 태운 이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지금도 이름 모를 역에서 긴 선로를 바라보며 고향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까. 줄이 시간을 넘어있어 부득이 장미공원으로 들어간다. 각가지 장미 장식이 시선을 끈다. 엄청난 관광객이 인파를 이룬다. 장미를 사랑하는 우리는 어쩌면 장미를 닮았는지 모른다. 아니면 마음의 호젓한 텃밭에 장미를 키우고 있는지 모른다. 장미는 내 안에서도 필 수 있다. 장미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내 내면의 아름다움과 만나 그 자체로 미의 왕관을 쓰는 때이다.


곡성 세계장미축제장의 장미 여신상.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곡성 세계장미축제장의 장미 여신상.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장미 여신상이 있어 다가간다. 머리에 보라색 머리칼에 장미를 꽂고, 붉은 입술, 향기에 취한 듯 감은 눈은 신비롭다. 여기도 포토존이다. 연인들 가족들 그리고 추억의 엽서에 장미 여신을 새기기 위해 사진 촬영에 몰두하는 관광객들. 그들은 한편 영화의 주인공처럼 기념사진의 필수 코스를 거친다. 그리고 장미 여신의 감은 속눈으로 걸어 들어간다. 거기에도 흰 장미가,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겨울에 피는 흰 장미가 만발하고 있을까. 오늘 딱 하루만은 여신의 신비에 공감하고 그녀의 고백을 경청하고 싶다. 장미 여신은 우리 보통 사람들과 너무 닮았다. 오히려 에로스 신화처럼 정념이 뚝뚝 흐르는 교태가 더 품격을 높인다. 잠시 여신이 눈뜨기를 기다린다. 그 눈은 어떻게 생겼을까.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조각가도 그 눈을 표현할 수 없어 감은 눈으로 했을 것이다. 눈을 감고서도 세계를 다 볼 수 있는 여신이 눈을 뜰 리 만무하다. 저 장미 여신은 나의 영원한 기억에 남으리. 그 물씬 풍기는 사랑의 향기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그 옆 천사 미로원도 온통 장미의 천국이었다. 각양각색의 장미들이 나의 감탄으로 흔들리고 있다. 네게로 밀려오는 코를 쏘는 향기 그러나 매번 그 황홀 속에서 퍼 올린 것은, 수천 갈래의 길이었다. 꽃 한 송이마다 길이 열리고 그 많은 꽃에서 그토록 찾던 길들이 보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나는 여전히 나그네이고 바람일 것이다. 잔디밭 지나 중앙광장으로 간다.


곡성 세계장미축제장 내 조형물. 장미를 양손에 쥔 목인.

곡성 세계장미축제장 내 조형물. 장미를 양손에 쥔 목인.

중앙무대 공연장에서 그때 마침 꿈드림 예술단의 국악 공연이 있었다. 10명이 넘는 소리꾼이 혼으로 부르는 창가의 제목은 솔직히 몰랐지만, 그 노래는 흥겹다가도 한이 느껴지기도 하고, 감정선을 울렁거리게 하는 창법이었다. 모처럼 우리 민족의 정서와 멋 풍류에 젖어 허우적거리는데, 그 다음 진도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이 구전민요는 그나마 내가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우리 민족의 해학이 담겨 있고 애절하고 섬세하며 구슬픈 계면조, 즉 듣는 자가 눈물을 흘려 그 눈물이 얼굴에 금을 긋기에 붙여진 이름의 소리, 끝마침이 꼬리가 이어지듯 자르르 굴러간 슬픔이 두 손이 되어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노래였다. 그 가사 중 유난히 여운이 남는 몇 구절을 옮겨 본다.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 굽이야 굽이 굽이가 눈물이로구나.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흥흥흥 아라리가 났네. 정든 님 오신다기에 꾀를 벗고 잤더니 문풍지 바람에 고뿔만 들었네. 까마귀 검다고 속조차 검냐 겉 몸이 늙었다고 마음조차 늙냐. 사람이 살며는 몇백 년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저 건너 저 가시나 눈매를 보아라 속눈만 뜨고서 달만 보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눈물도 많다.' 영화 서편제에서 '황토 먼지 옷삼아 떠도는 소리꾼들의 한과 신명' '이년아 가슴을 칼로 저미는 한이 사무쳐야 서편 소리가 나오는 뱁이여' 그때 그 대화.


달빛 내리는 청산도 보리밭길에서 부르던 진도 아리랑은 슬픔에 젖을 때마다 귓전에 맴돌며 아프게 공명한다. 광장 옆 마로니에 길로 들어선다. 축제장은 넓었고 다닐 길도 많았지만, 다음 코스 도림사와 황산대첩비지를 들리기 위해서는 이 길을 걷고 출구로 나가야 했다. 5월의 마로니에는 하늘을 향해 무성한 꽃을 피우고 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마로니에가 과거의 음반이 되어버렸는지, 박건이 불렀든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 팔랑거리는 잎사귀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드리운 나무 그늘에 일렁이는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린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 여전히 아름다운 뭔가가 기다리고 있는 다음을 향해.


글=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유판도 여행사진작가


문의: 전남 곡성 관광 안내소 (061)360-8419, 363-8379


주소: 전남 곡성 오곡면 기차마을로 294, 232


트레킹 코스: 후문 매표소–상수리 길-곡성역사-증기기관차 매표소-장미공원-장미 여신상-중앙광장 중앙무대-음악 분수-마로니에 길-출구


인근 볼거리: 도림사, 압록유원지, 태안사, 침실 습지, 청계도 계곡, 곡성 짚라인, 곡성 섬진강 천문대, 곡성 기차 마을 전통시장, 가정역,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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