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짓다’, 예술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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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06   |  발행일 2018-09-06 제30면   |  수정 2018-09-06
배우들 겹치기 출연하니까
연기기계 된 경우 적지않아
연극은 지어올려야 하는 법
오랜시간 교감과 공감으로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야
[여성칼럼] ‘짓다’, 예술하는 마음
김미정 극단 구리거울 대표 연출평론가

며칠 전 제자에게서 안부전화가 왔다. 이태 전부터 공연현장에 보이지 않아 근황을 물었더니, 가업을 익히면서 가끔 선배극단의 일을 돕고 있다며 겸연쩍어했다. 나는 “한참 뒤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그를 다독였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연극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 연극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곱씹어보고, 그래도 네 영혼을 사로잡고 또 연극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면 그때 다시 시작하라”고. 그리고 “그제야 연극의 깊은 맛을 알게 되는 법”이라고.

근년 들어 지역공연계는 청년 배우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인원도 몇 되지 않거니와 잘 훈련된 배우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대학 졸업 후 직장을 구하거나 서울로 가버린다. 지역공연계를 지키는 청년들도 예술에 대한 신념이나 간절함이 사라진, 그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만 가득차서 덤벼드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사색하고 훈련받는 과정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꼰대들이 하는 짓이라 치부해버린다. 물론 이들만이 뿜어낼 수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와 기기묘묘한 상상력이 있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익고 또 익어 무르익은 무대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미처 이르지 못하는 것 같다. 더욱이 몇 안 되는 배우들이 겹치기 출연을 하다 보니 요령만 늘고 깊이는 없는 ‘연기기계’가 된 경우도 적지 않아 믿고 맡길 젊은 배우가 드물다.

노래를 조립하고 물건을 3D 프린터로 찍어내는 세상, 긴 시간 기다리고 무르익도록 지켜보고 섬세하게 빚어내는 과정은 낡고 또 촌스러운 방식으로 치부하는 요즈음, 새삼 그리운 단어가 있다. 바로 ‘짓다’라는 동사다. 밥을 짓고, 독을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글을 짓고, 노래를 짓고, 이름을 지을 때 쓰는 표현이다. 복을 짓고 죄를 짓기도 한다.

무엇을 ‘짓는다’라는 말은 짧지 않은 시간에 여러 단계의 숙성과 발효의 과정을 거친 뒤 다시 다듬고 매만져 기어이 깊은 맛과 은은한 향이 우러나는 그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무엇에 영혼을 바치고 정신을 다 쏟되 은근한 숯불처럼 오래오래 그리고 뜨겁게 타올라야 한다. 고(故) 박완서 소설가는 “창작의 가장 큰 자산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작가의 삶’”이라고 말했다. “영감의 원천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경험이 누적돼서 그것이 속에서 웅성거릴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존재의 본질과 맞닿은 곳에서 떠오르는 영감으로 시간을 두고 익혀가야 영혼의 깊숙한 데를 건드리는 감동을 자아내는 법이다.

연극은 만들고 찍는 물건이 아니라 지어 올려야 하는 생명체다. 오랜 시간에 걸쳐 교감하고, 공감으로 자아낸 실로 촘촘한 결과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작업이다. 마치 베 짜기나 집 짓기와도 같은 작업이다.

연극 ‘1동 28번지, 차숙이네’(최진아 작·연출)는 1동 28번지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이차숙 여사와 자녀들이 낡은 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어 올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연극의 주인공은 집이다. 배우들은 중간중간에 집을 짓는데 필요한 흙과 돌과 물, 콘크리트와 철근, 그리고 건축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를 관객에게 해설해 주기도 하지만 실제로 무대 위에 집을 짓는다. 땅을 다지고 측량을 하고 골재를 쌓으며 집을 짓는 동안 이차숙 여사 일가는 인부와, 이웃과, 공무원과, 그리고 건축법과 일일이 부딪치고 또 화해한다.

이 연극은 결국 집을 다 짓지 못하고 끝나지만 집은 어떤 의미인지, 집의 가치를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집이 보금자리가 아니라 재산으로 변해버린 지금, 평당 값이 매겨지고 역세권 여부에 따라 가치가 평가되는 이 시대에 집은 바로 가족의 일원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또한 그 짓는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공감으로 지어진 것이므로 집이라는 사물이 얼마나 귀하게 만들어졌는지 깨닫게 된다. 삶을 바라보는 눈도 더 깊어진다. 예술을 하는 마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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