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의 해 대구 영화인 봉준호의 선물

  • 김수영
  • |
  • 입력 2019-06-21   |  발행일 2019-06-21 제33면   |  수정 2019-06-21
韓영화 100주년과 대구영화 역사 (상)
20190621
사문진나루터에서 촬영된 이규환 감독·나운규 주연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 1952년 제작된 민경식 감독의 ‘태양의 거리’, ‘공동경비구역 JSA’(2000), ‘기생충’(2019) (위에서 부터).
최근 칸영화제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한국에 처음 안겨준 봉준호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올해가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이다. 칸영화제가 한국영화에 의미가 큰 선물을 줬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에 이보다 더 의미 있고 큰 선물은 없을 것이다. 이번 수상이 특히 대구경북 지역민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봉 감독이 지역 출신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번 수상을 통해 대구 출신 영화인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됐다.

한국영화 100주년과 봉 감독의 칸영화제 수상을 계기로 한국영화와 대구영화의 발자취와 그 가능성을 2회에 걸쳐 살펴봤다.


조선 최초 영화 1919년 ‘의리적 구토’역사의 기점
20∼30년대 중반 ‘아리랑’‘춘향전’제작 첫 황금기
광복까지 日 군국주의 선전 내용…공보활동 수단


20190621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


◆1919년 영화 ‘의리적 구토’ 탄생=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이라고 한다. 그러면 어떤 것이 한국영화의 역사를 출발시킨 기점이 되었을까. 일반적으로는 1919년 10월27일 조선 최초의 영화로 알려진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상영된 날을 기점으로 한다. 영화인협회는 이 날을 ‘영화인의 날’로 지정하고 1963년부터 매년 기념하고 있다. 물론 1900년대 초부터 개화기 조선에 활동사진이 상영되기 시작했고 외화 프로그램을 상영하면서 진고개(명동과 충무로 지역)와 종로 일대에 극장가가 형성되었다. ‘의리적 구토’가 제작되기 전까지 약 20년은 수입영화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의리적 구토’는 연극공연 중 일부 장면을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연쇄극’이라 영화로서는 불완전한 형식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한국 영화의 기점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후 192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극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한다. 1930년대 중반까지 나운규의 ‘아리랑’(1926), 심훈의 ‘먼동이 틀 무렵’(1927),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최초의 발성영화인 이명우의 ‘춘향전’(1935) 등이 제작되면서 한국영화의 첫 황금기를 맞게 된다.

◆1940년 ‘조선영화령’ 공포= 1940년 1월 조선총독부가 영화법령인 ‘조선영화령’을 공포한다. 영화의 제작·배급 및 흥행 등 각 분야에 대한 통제와 규제를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영화를 전시체제의 옹호와 선전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다. 조선영화령이 공포된 이후 1945년 광복까지 제작된 영화는 대부분 일본 군국주의를 선전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광복이 되면서 영화가 공보활동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즈음부터 미국문화의 영향력이 확대되기 시작했고, 극장가는 미국 8대 메이저사의 독점 배급사인 중앙영화배급사가 배급한 미국 영화가 주로 상영되었다.

1950년대는 6·25전쟁 등으로 인해 영화인 월북사태가 잇따랐으며 기록영화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특히 6·25전쟁 후 5년 동안에는 민간 영화산업이 형성되지 못해 군대, 행정기관, 경찰 관련 조직에서 광범위하게 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60년, 김기영·신상옥 감독 대표작 쏟아지며 성과
한국영화 걸작으로 꼽히는 유현목 ‘오발탄’ 탄생


영화법 제정·TV 보급…90년대 초까지 장기불황 사문진나루터에서 촬영된 이규환 감독·나운규 주연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 1952년 제작된 민경식 감독의 ‘태양의 거리’, ‘공동경비구역 JSA’(2000), ‘기생충’(2019) (위에서 부터).

◆1960년대 한국영화 본격 성장= 전쟁의 상흔이 어느 정도 수습되어 가면서 1960년대는 서구 민주주의의 가치가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1960년 4·19혁명에서 1961년 5·16군사 쿠데타에 이르는 기간은 민주적 정책과 변화의 에너지로 인해 한국영화에서도 발전적 성과가 있었다. 김기영, 유현목, 신상옥 등 한국영화의 발전을 이끈 감독의 대표작들도 쏟아졌다. 특히 한국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유현목의 리얼리즘 영화 ‘오발탄’(1961)도 이때 탄생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신상옥의 ‘로맨스 빠빠’(1960), 강대진의 ‘박서방’(1960), ‘마부’(1961), 이봉래의 ‘삼등과장’(1963), ‘월급쟁이’(1963) 등 가족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가족드라마가 많이 제작되었다.

영화산업의 보호와 육성을 목적으로 한 영화법도 1962년 제정되었다. 영화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한다는 영화법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강력한 통제를 실시하는 모순적인 법이었다. 메이저 영화사를 육성하기 위해 영화제작자만 외화 수입이 허용되었던 수입, 제작 일원화 정책과 영화 통제를 위한 시나리오의 사전 검열, 필름의 실사 검열이라는 이중 검열 체제를 시행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TV가 1970년대에 널리 확산되고 군사정권의 검열 등으로 인해 국책영화가 양산되면서 한국영화의 질적 하락으로 이어져 1990년대 초까지 한국영화는 장기불황을 맞게 된다. 전국의 영화관은 물론 관객수도 점차 하향세를 보였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