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별주부와 토끼, 교차되는 운명과 충돌하는 가치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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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13   |  발행일 2019-08-13 제30면   |  수정 2020-09-08
집단 위해 희생하는 별주부
개인의 욕망·자유 좇는 토끼
어떠한 삶이 더 옳다고 할까…
다름이 있을땐 배제가 아닌
동행을 선택해야 갈등 해소
20190813
신호림 안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세대 간 갈등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오늘날만큼 상호 세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그래서 나름의 방식대로 다른 세대를 규정해보거나 그것마저 포기하고 외면해버리는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이 특별히 문제가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사회의 가치체계에 대한 반론이나 거부가 가능해지면서 기존에 추구했던 가치와 새롭게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정도로 봐야할 것 같다.

갈등의 원인을 단순화시키거나 어떤 단일한 문제로 환원할 생각은 없지만, 최근 눈에 띄는 갈등을 하나 꼽아보자면 역시 개인과 집단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수직적 위계질서를 토대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어느 정도 감수하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워라밸을 추구하고 집단과 개인의 운명을 동일시하지 않는 세대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개인과 집단 사이의 가치 충돌 문제가 다시 표면화되었다.

여기에서 ‘다시’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미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문제에 대한 고민이 문학적으로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주부전’이나 ‘토끼전’으로 명명되는 이 작품은 작품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별주부와 토끼라는 두 주인공을 앞세우고 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수궁의 지배자인 용왕이 어느 날 병을 얻게 되는데 하늘의 선관(仙官)이 유일한 치료약은 토끼의 간밖에 없다고 알려준다. 육지에 사는 토끼를 잡기 위해 수궁에서 파견되는 별주부는 수직적 위계질서로 구성된 어족(魚族) 집단의 운명을 온몸으로 껴안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육지로 나간다.

그런데 육지는 수궁과 상황이 다르다. 그곳에는 용왕과 같은 지배자도 없다. 토끼는 개인의 생존과 영달을 위해 육지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토끼는 부와 명예를 보장해준다는 별주부의 감언이설에 쉽게 속아 수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수궁에 들어간 토끼는 별주부의 말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지만, 간을 육지에 놓고 왔다는 기지를 발휘하여 수궁에서 탈출하게 된다. 속고 속이는 과정을 통해 수궁과 육지를 오가면서 별주부와 토끼의 운명은 계속해서 교차되며,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던지기에 이른다. 집단의 존속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별주부의 삶과 그런 집단을 부정하고 개인의 욕망과 자유를 좇는 토끼의 삶 중 무엇이 더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조선시대에도 어느 하나의 답을 찾기 어려웠던 것 같다. 송만재(宋晩載)는 ‘관우희(觀優戱)’에서 별주부를 충신으로, 토끼를 얄밉다고 표현함으로써 별주부의 편을 들었고, 이유원(李裕元)은 ‘관극팔령(觀劇八令)’에서 토끼를 신령스럽다고 표현함으로써 토끼의 편을 들었다. ‘별주부전’ 또는 ‘토끼전’의 결말부도 이본(異本)마다 다양하다. 토끼의 삶을 긍정한 향유층은 토끼가 육지로 돌아온 이후 자유를 되찾고 별주부와 용왕은 죽음을 맞이했다는 결말부를 이끌어냈고, 별주부의 삶을 긍정한 향유층은 별주부가 교활한 토끼를 놓쳤지만 결국 약을 구해서 용왕을 살려내고 충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정답은 없고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별주부와 토끼의 삶은 개인이 취할 수 있는 두 개의 선택지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지점은 별주부와 토끼가 함께 수궁과 육지를 이동하면서 서로의 삶을 비춰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어색한 동행은 서로가 지향하는 삶이 상대방의 입장에서 봤을 때 수긍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 또한 완벽하지 않고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개인과 집단의 가치충돌 문제가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오늘날, 별주부와 토끼를 통해 우리가 간취할 수 있는 점은 배제가 아닌 동행을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인 셈이다. 그 가능성부터 인정해야 ‘다름’에서부터 시작된 가치갈등 또는 세대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호림 안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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