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거창 감악산 연수사와 의동마을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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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5   |  발행일 2019-11-15 제36면   |  수정 2020-09-08
일주문 속 하늘로 오르는 돌계단
600살 은행나무의 슬피 우는 전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거창 감악산 연수사와 의동마을
감악산 연수사 일주문과 600년 된 은행나무가 늦가을 한폭의 그림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거창 감악산 연수사와 의동마을
감악산 연수사. 신라 애장왕 3년인 802년에 감악대사가 창건했으며 조선 숙종 때 벽암선사가 사찰을 중수해 크게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매우 아담한 규모의 절집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거창 감악산 연수사와 의동마을
무촌리 마을회관 앞의 은행나무는 수령 400년의 암나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거창 감악산 연수사와 의동마을
의동마을 은행나무길. 100여m로 짧은 길이지만 가을 단풍 명소로 이름났다.


감악산(紺岳山)은 거창의 진산이다. 검은 빛을 띤 푸른 큰 산, 감악산이라는 이름은 거룩한 산, 신령스러운 산, 큰 산의 뜻인 ‘감뫼’로 곧 여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952m의 높이는 조금 지나치다싶게 가파른 비탈길을 품고 있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깊은 골에서부터 부드럽게 일어난 몸이 풍만한 자태를 펼쳐 놓고 있다. 감악산의 단풍은 타오르는 것에는 관심 없다는 태도로 빛들을 머금고 있었는데, 그 관대한 우월감은 마음속에 휴식과 아련한 현기증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거창양민학살사건’청연마을 관통
왕이 연수사 약수로 중풍고쳐 명성
돌수조 물소리 들리는 아담한 사찰

의동마을 입구 눈부신 은행나무길
밭, 지붕, 벤치, 담벼락 물든 노란빛
이 마을에서도 크게 들리는 물소리

◆감악산 연수사

내내 오르기만 하던 산길이 하강을 시작하는 고갯마루에 연수사(演水寺) 이정표가 있다. ‘청연’이라는 산골마을을 잠깐 관통하면 약수터가 나타나고 다시 산길이 시작된다. 청연마을은 6·25전쟁 당시 거창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신원면 지역에서 일어난 세 곳의 집단학살 중 가장 먼저 참극을 당했던 곳이 청연마을이었다. 그 때 84명이 죽었고 5명의 어린아이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엄청난 고요 속에서 약수터 물소리가 폭포소리처럼 들린다. 약수터에 기다리고 선 물통이 여러 개다. 연수사는 약수로 유명하다. 아니 감악산 물이 유명하다고 해야 할까. 극심한 가뭄에도 결코 마르지 않고 사시사철 물의 온도가 일정하다고 한다. 이른 새벽 감악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연수사 약수를 찾아가는 이들로 ‘연수사 물 맞으러 간다’고 한단다. 신라 헌강왕이 중풍을 크게 앓았는데 연수사 약수로 병을 고쳤다는 전설이 있다. 연수사 주차장이 넓다.

일주문 속으로 돌계단이 하늘 높이 오른다. 그 옆에 돌계단보다 높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무의 나이는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수나무다. 600년 전 고려 왕족과 혼인을 한 여인이 유복자를 낳고는 속세를 떠나 이 절에 들어와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날 한 노승이 아들을 데리고 가 공부를 시키겠다고 하였고 모자는 훗날을 기약하며 아들은 전나무를, 어머니는 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때 심었다는 전나무는 1980년쯤 강풍으로 부러져 없어졌고 지금은 은행나무만 남아있다. 은행나무는 가끔 슬피 운다고 한다. 곡을 하듯 슬피 운다. 그 소리가 인근 마을에까지 퍼지면 사람들도 함께 운다고도 한다. 은행나무의 몸에 난 깊은 고랑들은 나무의 눈물이 만든 흔적이라고도 전한다. 노랗게 뒤덮인 낙엽에서 축축함이 느껴진다.

연수사는 남상면 무촌리에 속하며 감악산 해발 951m 기슭에 자리한다. 거의 정상에 가까운 자리로 신라 애장왕 3년인 802년에 감악대사(紺岳大師)라는 이가 창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조금 더 남쪽에 터를 마련했는데, 어느 날 한밤중에 다듬어 놓은 큰 통나무가 없어져버렸고 다음날 현재의 대웅전 자리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절 자리는 바뀌었다. 이후의 연혁은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며 조선 숙종 때 벽암선사가 사찰을 중수하여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지금 연수사는 아주 아담한 사찰이다. 대웅전과 종각, 2칸 건물에 공간을 나눈 산신각과 칠성각, 세석산방(洗石山房)이라는 요사채가 전부다. 낯설거나 크게 조심스러운 감정이 들지 않는 친근한 절집이다. 마당 한쪽에 유명한 연수사 약수가 돌 수조를 타고 흐른다. 역시 물소리가 크다. 아주 미세하게 떫은맛이 나는 듯도 하다.

감악산을 내려와 무촌리 마을 앞을 지나며 또 한 그루의 은행나무를 본다. 아주 거대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 정도로 암나무다. 원줄기에서 새싹이 자라 3그루의 나무처럼 보이며, 원줄기를 포함한 3개의 줄기에서 8개의 가지가 뻗어 있다. 연수사 은행나무보다 200년 어린 이 나무는 누가 심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나무는 머리를 휘날리며 감악산을 바라보는 것 같다.

◆학리 의동마을 은행나무길

거창읍을 관통해 북쪽으로 조금 가다 의동(意洞)마을 이정표 따라 모곡천(毛谷川)변을 달린다. 천변 가로수들의 단풍이 근사하다. 모곡천은 곧 황강에 합류한다. 이곳에서 황강은 아월천(阿月川)이라 불린다. 사방이 트여 달빛을 잘 받아 땅 거위가 노는 것을 밤에도 볼 수 있어 아월천이라 했다고 한다. 아드내 혹은 아달내라고도 불린다. 아월천, 아드내, 아달내, 모두가 참 예쁘다. 천변은 너른 범람원이라 역시 달빛이 내려앉기 좋겠다.

아월천을 가로지르는 의동교를 건너면 곧장 눈부신 은행나무길이 시작된다. 거창읍 학리(鶴里) 의동마을 입구의 은행나무 길이다. 100m 정도로 짧지만 강렬한 노란빛과 무성한 이파리들로 이름나 있다. 수확이 끝난 사과나무 밭에도, 딸기 하우스의 하얀 지붕 위에도, 허물어질 듯한 창고의 박공지붕 위에도, 길가 벤치에도, 어느 집 좁은 담벼락 위에도 모두 노란 은행잎이다. 초입에 2011년 ‘제1회 거창관광전국사진공모전’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 있지만 이 나무들의 유래에 대해 알 만한 내용은 없다.

의동마을은 여의골이라고도 한다. 예부터 여우가 많은 골을 여우골, 여의골이라 했다던데 이곳도 같은 의미일까. 원래 마을은 북동쪽으로 1㎞ 정도 위에 있었으나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선산(善山) 김우봉(金羽鳳)이 영조 때인 1770년에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남서남쪽으로 트인 말발굽모양의 작은 분지로 마을 어귀 남쪽은 뱀 머리 모양이고 북쪽은 자라목 모양인 명당이라 전한다. 조경에 신경 쓴 집들이 많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 시멘트 담장, 벽돌담 등 골목길 표정이 다양하다. 오래된 건물 하나가 있어 들어가 보니 ‘정의재(正義齋)’와 ‘구남서당(龜南書堂)’ 현판이 걸려 있고 여러 편액들이 빼곡하다. 1920년에 구남 김순각이라는 이가 세운 것이라 한다.

기이하게도 이 마을 안에서도 물소리가 크다. 어디선가 계속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마을 가운데에 공동 수도 시설이 있는데 그 아래에서도 들린다. 마을 안쪽 높은 지대에 여의정(如意亭)이라는 쉼터가 있고 그 옆에 오래된 우물이 있다고 했는데 쉬이 상상할 수 있는 우물의 모습은 아니었다. 연수사 약수와 구조가 비슷하나 돌수조 대신 플라스틱 관과 고무 대야다. 빨래판으로 썼을 넓적한 돌이 정겹다. 대문 없는 뒷집에서 쪼그만 강아지가 쫓아 나와 하얀 삼각뿔모양의 앙증맞은 이빨을 드러내며 캉캉 짖는다. 멀리 마을 입구 은행나무들의 우듬지가 손바닥만큼 보인다. 노란 잎들 떨어진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광주대구고속도로 거창IC로 나간다. 거창읍방향으로 가다 1084번 도로를 타고 거창박물관 쪽으로 간 뒤 계속 직진하다보면 남상면사무소 지나 왼쪽에 무촌리 마을회관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가 보인다. 약간 더 직진하면 오른쪽 길가에 연수사 이정표가 있는데, 그곳에서 좌회전하면 감악산을 오르는 길이다. 고갯마루에 다다르면 청연마을 버스정류장과 ‘연수사’ 이정표가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산길을 더 오르면 연수사다. 의동마을은 24번 국도를 타고 거창읍내를 관통한 뒤 1089번 지방도를 타고 조금 가면 오른쪽에 ‘의동, 구례, 양평, 당동마을’을 묶어 표기해 놓은 이정표가 있다. 모곡천을 따라 가다 의동교를 건너면 곧바로 의동마을 은행나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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