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1일은 대구시민의날…2월21~28일은 대구시민주간] (하) 올해 60주년 맞는 2·28민주운동 의의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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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20   |  발행일 2020-02-20 제13면   |  수정 2020-02-21
대구서 울려 퍼진 학도들의 외침,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 큰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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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28일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린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유세장 모습.
228농성
경대사대부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장면.
228시위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중앙로에서 경북도청쪽으로 향하고 있는 학생들.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 2·28민주운동이 올해로 60주년을 맞았다. 2·28민주운동은 광복 이후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대구에서 시작된 작은 물결이 전국으로 확산돼 민주화의 물꼬를 튼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셈이다. 더욱이 운동 주도층이 고교생들이라는 부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구 시민정신의 발로인 2·28민주운동 60주년을 맞아 대구시는 올해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한다. 유공자 1천여명을 발굴해 현창하고, 민주운동사를 재조명하는 국제학술대회도 연다. 또한 매년 2월21~28일 진행되는 '시민주간' 프로그램을 알차게 구성해 대구시민의 자긍심을 고취할 계획이다. 이에 영남일보는 시대를 관통해 대구 시민정신으로 자리잡은 2·28민주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의의에 대해 소개한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이승만 독재정권

광복 이후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정국을 이끌어 나가는 데 필요한 지원 세력이 부족했다. 한 때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을 지원했던 한국민주당마저 초대 내각 구성에서 푸대접을 받은 뒤 적대적인 세력으로 돌아섰다. 더욱이 6·25전쟁 기간 부정부패,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민심이 등을 돌리고 국회 내 야당세가 강해졌다. 이승만은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키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유당 창당과 동시에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강행한다.

이승만 정권 부패·부정선거에 분노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대구 8개 고교생·청년 당당히 맞서


발췌개헌(拔萃改憲)을 통해 재집권하게 된 이승만은 반공을 구실로 반민주적 전제(專制)를 시작했으며, 의회는 전제적 행정권에 의해 그 기능을 상실해 갔다. 이후 이승만과 자유당은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군과 방첩대, 경찰의 지원을 받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이어 이승만의 종신 연임을 보장하는 개헌안을 제출하고 '사사오입 개헌' 이라는 정치극을 연출하기에 이른다.

정권 반대 세력은 호헌동지회를 구성하고, 반공·반독재를 표방한 신당 건설을 주장하면서 결집했는데 바로 민주당 창당이었다.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56년의 일이다. 당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70%의 지지로 당선됐으나,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張勉, 1899~1966)이 뽑혔다. 직전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던 자유당에 장면의 당선은 큰 충격이었다. 1958년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은 서울에서만 14명의 당선자를 낸 반면, 자유당은 1명 당선에 그쳤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 앞서 치밀한 부정 선거계획을 세우게 된다. 먼저 경찰과 지방 행정의 총수인 내무부 장관에 친일파였던 최인규(崔仁圭, 1919~1961)를 임명하고, 관권선거(官權選擧)를 준비했다. 당시 내무부는 전국 각급 기관장에게 구체적인 부정 선거 방법까지 지시했다. 구체적으론 △4할 사전 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의 지침을 내린 것. 또한 투표함 수송 도중 투표함 교체, 모든 투표구에서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을 85% 이상으로 할 것 등의 세부 계획까지 마련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당내 신·구파 간의 갈등과 자유당의 분열 속에서 가까스로 전당대회를 열어 조병옥(趙炳玉, 1894~1960)과 장면을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했으나 조병옥이 사망하고 만다. 사실상 이승만의 승리가 확정된 가운데 자유당은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당선을 확실히 하기 위해 부정 선거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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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 두류동에 위치한 2·28민주운동 기념탑. 2·28민주운동은 대구지역 고등학생과 청년들이 '학원의 정치도구화 반대'를 외치며 평화적 거리시위를 벌인 민주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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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반월당에는 1960년 2월28일 대구 학생들의 시위를 위해 모여들었던 집결지를 기념하기 위한 표지판이 마련돼 있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3·15 정·부통령 선거 운동이 최고조에 달하던 1960년 2월28일 민주당 장면의 유세가 대구에서 예정돼 있었다. 대구는 전통적으로 야당세가 강한 만큼 자유당은 이날 선거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특히 하루 전날인 27일 대구 수성천변의 자유당 유세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청중을 동원하고, 민주당 유세에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청중이 모이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데 골몰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끝내 학원에 대한 통제로 이어져 일요일 등교 지시령을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2월25일, 학기말 시험 일정을 갑자기 변경하고 일요일임에도 등교하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경북고 학생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 강요 처사에 대해 불평을 토로했다. "일요일에 등교할 이유가 뭔가" "무엇 때문에 우리들이 정치적 이용물이 돼야 하느냐"등의 성토가 온 학교를 들끓게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는 시위를 결심하고, 27일 밤 몇몇 동료와 실행계획을 세웠다. 이날 모임에는 대구고와 사대부고 학생위 간부도 참가해 반월당에서 합류하기로 뜻을 모았다.

광복 이후 최초의 민주화운동 평가
3·15의거, 4·19혁명 도화선 역할도
유공자 발굴 등 다양한 기념사업 추진


28일 낮 12시 경북고 학생들이 속속 학교에 모여들었다. 12시55분이 되자 이대우와 학생위원 안효영이 두루마리 결의문을 움켜쥐고 단상에 뛰어 올랐다. 결의문을 읽어 내려가자 800여명의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이윽고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학원 내에 미치는 정치세력 배제하자" 등의 구호와 함께 시위가 시작됐다. 교사들이 만류했으나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학생들은 대구상고, 경북대사대부고 앞에 이르러 동참을 호소한 뒤, 반월당 네거리로 진출했다. 오후 1시30분쯤에는 도청에 진입해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오후 3시쯤까지 시위를 이어갔고, 110여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도청에서 빠져나온 학생들은 다시 대오를 짜고 행진해 자유당 경북도당 앞으로 진출했다. 당국은 수백명의 경찰 병력을 투입해 무력으로 이들을 제지했다. 다시 흩어진 학생들은 시청광장과 경북도지사 관사 등으로 이동해 시위를 이어가다 결국 경찰의 저지로 추진력을 잃고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숨겨주고, 응원하는 등 시위에 동조했다.

◆민주주의 역사에 이정표를 세우다

대구고 학생들도 반정부 시위에 동참했다. 전날 학생위원들은 경북고, 사대부고 학생들과 이미 자유당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에 참가하기로 결의한 터였다.

28일 오후 경북고의 상황을 파악하고 온 손진홍 학생위원장이 교문에 들어서며 "우리도 민주 대열에 합류하자"고 외치자 100여명의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뛰쳐나갔다. 앞서 결의문이 발각돼 교사들의 만류가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학생들은 경북여고 앞을 지나 반월당을 거쳐 중앙파출소 방향으로 나아갔다.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우리에게 인류애를 달라"는 함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경찰에 쫓겨 학교로 되돌아 갔지만 학생들은 교내에 남아있던 인원들과 다시 대열을 맞춰 2차 시위에 나섰다. 남문시장 네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한 이들은 일부가 연행됐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역 앞까지 시위를 이어나갔다.

3개교 연합전선을 구축한 경북대 사대부고 학생들도 이날 시위 참가를 위해 4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하지만 시위를 막으려는 교사와 부모들의 만류로 학교에서 농성을 벌이게 됐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학생과 학부형 사이에 실랑이는 심해지고, 교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오후 7시가 되자 흥분한 200여명의 학생들은 학교 담장을 넘어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삼덕네거리와 대학병원을 지나 경북도지사 관사와 자유당 경북도당사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에 연행됐다. 일부 학생들은 다시 세를 규합해 언론사를 찾아가 결의문을 전달했다.

다른 학교의 시위소식을 들은 경북여고와 대구여고는 학생들이 동참하지 못하도록 교문을 걸어 잠갔다. 이에 굴하지않고 일부 여학생들은 담을 넘어 학교를 빠져나와 시위에 나섰다. 경북여고 학생 100여명과 대구여고 학생 300여명은 삼덕네거리에서 합류해 수성 천변 유세장으로 향했다. 경찰의 제지로 일부는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대구공업고와 대구농림고, 대구상업고 일부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다른 학교의 행진에 동참하거나 사복으로 바꿔 입고 수성 천변에서 열린 민주당 강연회에 참석한 이들도 있었다.

2·28민주운동은 학생운동의 첫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승만정권이 수립된 이래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으로 묶여 북진멸공·반공방일 시위에 동원돼야 했다. 그런 학생들이 현실을 비판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이며, 무기력하게 침묵하고 있던 민족혼을 일깨운 셈이다. 실제 2·28민주운동은 마산, 대전, 부산, 서울 등으로 학생시위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3·15의거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광복 이후 처음으로 민주개혁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자생적이고 독립적인 시위였다는 점에서도 높은 상징성을 갖는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이정표를 세운 2·28민주운동은 대구 시민정신이자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시대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글=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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