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LP로드] 대구 구암동 '사이섬'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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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21   |  발행일 2020-02-21 제41면   |  수정 2020-02-21
커피향에 녹아든 재즈…상처 받은 영혼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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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섬'을 위해 의기투합한 이호원(오른쪽)·강현석은 자신들의 모교 옆에 커피바 같은 사이섬을 론칭해 일상에 지친 도시인에게 재즈 뮤직 같은 아늑한 치유의 시간을 주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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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섬은 가장 최적화된 재즈 뮤직 등을 엄선해 기후와 사회적 이슈 등을 실시간으로 반영해 음악을 내보낸다.

정현종 시인의 시(詩) '섬'은 단 두 줄. 정말 짧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이게 전문이다. 그 시에 감명받아 소외 받고 고립된 도시사회의 일상에 휘둘리고 있는 사람을 위해 섬 같은 커피바를 오픈한 사내가 있다. 대구 북구 구암동 자동차면허시험장 정문 맞은편에 있는 '사이섬'. 커피숍 같은 바이다. 잃어버리고 지워진 심성을 되찾아주는 섬이다. 음악도 인스턴트가 아니다. 샘물처럼 주인이 직접 길어와서 내민다. 대다수 재즈곡 위주이다. 이호원(38)·강현석(39). 단짝인 둘이 지난해 8월부터 그 섬의 주인이 된다. 구암고 선후배 사이지만 스타트업 창업자의 유전자를 가진 인생도반이다.

이호원은 '팔색조 문화 비즈니스맨'이다. 미국 실리콘밸리 창고형 연구실에서 커피를 마시려고 문을 열고 나오는 포스다. 그는 매 순간 달라지는 세상에 최적화된 각종 비즈니스 콘텐츠를 개발하는 크리에이티브 에디터랄 수 있다. 지난달 23일 그는 창업 40주년을 맞은 랑콤화장품 측으로부터 뜻깊은 제안을 받아 성공리에 수행했다. 서울 롯데호텔 상공에 300대의 드론을 띄워 멋진 마케팅을 이행한 것이다. 회사 측이 평창동계올림픽 드론프로젝트팀에 과업을 줄 수도 있었지만 남다른 소통능력을 인정해 그한테 사업건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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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섬 입구 전경.

◆샘물처럼 솟는 재즈

지난 7일 낮 12시 무렵 사이섬에 도착했다. 어둑한 조도는 요즘 시류와 조금 달랐다. 하지만 샘물처럼 솟는 재즈뮤직은 수정처럼 명징했다. 뉴욕 맨해튼 뒷골목 재즈카페에서나 어울릴 법한 재즈 명곡이 5곒 원목 바테이블 위를 고양이 발걸음처럼 핥고 지나간다. 손님은 그 음을 딛고 먼 세계로 여행을 할 수 있다.

두 사내는 각자 맡은 파트를 충실히 이행한다. 둘은 원래 구암고 시절 힙합에 쩔어 있었다. 강현석이 먼저 재즈에 눈을 떴고 뒤이어 이호원이 그 뒤를 좇는다. 재즈는 물론 양조 마니아이기도 한 강현석의 핸드드립 모션은 로스터와 바리스타의 두 기운이 겹쳐져 있는 것 같다. 그의 재산목록 1호인 턱수염은 이 가게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랄 수도 있다. 강현석은 사이섬을 위해 서울 이태원의 '로스태쉬'를 지인한테 맡기고 기꺼이 대구로 내려왔다. 로스태쉬는 로스터와 머스태쉬(Mustache·콧수염)의 합성어.


팔색조 문화 비즈니스맨 이호원
재즈·양조 마니아 강현석과 투합
지친 일상 탈출…섬 같은 커피바

고향 염두 만든것 같은 '칠곡라떼'
차분한 기운 보충 보이차도 내놔
열풍식 원두, 직화식 로스팅 공수
커피 맛 좀 아는 단골도 점점 확충
음악은 날씨·사회적 이슈 등 반영
비올땐 촉촉하고 꼽꼽한 레퍼토리



그는 보름마다 한 번씩 거기 가서 볶은 원두를 갖고 내려온다. 그는 7년간 서울 이태원 외국계 펍에서 지독한 경험을 했다. 바닥이 뭔가를 좀 알게 됐다. 그 경험의 연장이 바로 커피공방격인 로스태쉬이다. 덕분에 사이섬은 커피 맛 좀 아는 단골을 확충하게 된다. 가게 옆에 로스팅룸이 있다. 여기 세팅된 프로밧 기계로는 열풍식 원두, 로스태쉬에 있는 후지로얄 갖고는 직화식 로스팅을 한다. 커피의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맛을 단골에게 고루 맛보여주기 위해서다. 처음엔 커피 사업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픈한 뒤 1개월가량 커피를 무료로 제공했다. 사회생활에서 입은 상처를 사이섬에 와서 치료받도록 해주고 싶었다. 커피 향과 재즈 뮤직은 쿵짝이 맞았다. 상처받은 영혼이 여기서 좀 쉴 수 있게 한다.

커피와 함께 보이차도 판다. 계기가 있다. 어느 날 이호원이 중구 봉산동의 한 찻집에서 서예가 일사 석용진의 도록을 정독하게 됐다. 노장철학과 현대물리학 등 해박한 일사의 인문학적 안목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찻집 주인의 소개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올해 일사로부터 신년 휘호와 경자년 흰색쥐 판화 이미지에 감동을 받는다. 즉시 그 이미지를 원두 봉투에 스티커처럼 부착했다.

◆딩굴딩굴 구석자리

출입문 바로 옆 두 자리는 홀로족이 독서하며 멍 때리기 딱이다. 메모장도 있고 읽을만한 책도 여럿 세워놓았다. 기타의 거장 에릭 클랩튼 평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두 사내는 유달리 음악에 비중을 둔. 오픈하기 전에 이거다 싶은 곡들을 엄선했다. 그걸 상황에 맞게 끄집어내 사용한다. 이유 없는 음악은 삼간다. 그날의 날씨, 손님의 취향, 계절, 사회적 이슈 등을 감안 해 이거다 싶은 것만 선별 방출시킨다. 노래보다 연주곡 비중이 높다. 해가 질 무렵이거나 비가 우울하게 내릴 때면 국내 가수도 공유한다. 유재하, 김현식, 김현철, 이소라, 재즈 여성보컬 나윤선과 말로 등. 촉촉하고 꼽꼽한 레퍼토리. 여느 카페용 스트리밍 뮤직과는 질감이 완전 다르다.

액자와 테이블도 엄선했다. 루이 암스트롱, 쳇 베이커, 엘라 피츠제럴드, 마일즈 데이비스, 찰리 파커 등 유명 재즈뮤지션의 사진을 정성스럽게 수제 액자에 담았다. 선택된 사진은 사진가에게 맡겨 질감을 새롭게 조정했다. 액자도 중요하다 싶어 장인한테 주문제작 했다. 그래서 무슨 갤러리용 액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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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헌정하기 위해 개발한 '칠곡라떼'. 검정깨 소스가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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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섬에서는 커피에 익숙해진 단골을 위해 차분한 기운을 보충해주는 보이차 등도 내놓는다.

◆여행디자이너 이호원

경영을 총괄하는 이호원. 그는 구암고에서 전교 1등을 한 수재. 하지만 그는 자기 재능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자만심이 자초한 '화'랄 수 있다. 학창시절 음악, 미술, 문학 등 여러 파트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한때 서울대 출신 뮤지션 유희열 때문에 음악도 생각했지만 부모의 뜻 때문에 경북대 전자공학과로 절충한다. 하지만 적성에 안 맞아 자퇴해버린다. 그리고 이유 없는 반항의 시절. 매일 술에서 일어나 술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음지의 또래와 어깨를 겨누며 거리를 쏘다녀 보기도 했다. 하지만 군에서 사회적 가치에 대해 깊게 성찰한다. 제대 전 정민이 지은 '미쳐야 미친다'란 책과 근대시대의 본질을 파헤친 주경철의 '대항해시대'에 크게 감동한다.

복학한 뒤 모든 에너지를 대학에 올인한다. 이때 총학생회가 기획한 상하이경제탐방에 따라 나선다. 그는 거기서 크게 충격을 받는다. 당시 후배들의 당당함과 지적 수준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다들 스펙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그는 촌닭에 불과했다.

그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들의 실력 또한 별게 아니라는 걸 절감한다. 2시간 너머 신세계가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여행산업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일본역사탐방 총괄기획 등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된다. 기성세대가 이미 깔아놓은 정해진 틀 속에서 움직이지 말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가치를 먼저 제시하는 마케팅을 구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신개념 여행상품을 론칭하게 된다. '여행디자이너'란 자부심을 갖고 2010년 중구 봉산동에 '다님'이란 여행컨설팅회사를 오픈한다. 서울 홍대에 있는 한 지인이 운영하던 '백패커 프렌즈'란 멀티플 호스텔 2호점의 모든 매뉴얼을 새롭게 설정하는 데 일조한다. 스태프들이 손님의 이름을 다 외우게 만들었다. 손님으로 왔다가 떠날 때 친구가 되도록 친근감 넘치는 호스텔을 유지했다. 훗날 자기 나라로 초대하는 단골이 늘어났다.

그 경험을 갖고 독자적으로 '다님트래벌'이란 신개념 여행사를 오픈한다. 국내 여행사의 고정관념과 한계를 파고들었다. 특히 유럽과 미주 외국인이 한국으로 오는 경우, 그들이 원하는 모든 요구사항에 최적화된 서비스를 설계해 제시했다. 그 결과, 지난해 아주 특별한 관광객을 유치한다. 바로 미국 하버드대 MBA 멤버 130명을 3주간 핸들링한다. 올해도 재계약을 받아낼 수 있었다. 1년에 100여 건 유치를 했다. 공동대표로 프랑스 삼성지사의 마케팅 팀장을 스카우트해 글로벌기업경영전략을 수립했다. 덕분에 '그레이스 킴'이란 프랑스의 유명 하우스 디제이를 국내로 데려 와 뮤직비디오를 찍게 했다. 그 동영상은 전 세계로 퍼졌다. 이때 사이섬에도 왔다.

이제 다님은 주식회사로 진화했다. 다님그룹은 OEM방식의 여행컨설팅업과 함께 광고영상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마케팅비즈니스 등은 물론, 다님LAB을 통해 창업 인큐베이팅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그 사업의 일환이 사이섬이다. 또한 외국인이 경영하는 한국 전통주 컨설팅업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칠곡라떼'는 사이섬 사내가 고향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 같다. 잘 갈린 검정깨 소스가 중심을 잡고 있다. 북구 구암동 671-8.

글·사진=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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